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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사진자료실/근대513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김좌진 김좌진 ★ 김좌진(金佐鎭, 1889~1930) :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인. 충청남도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고 가노 해방 및 전답을 무상 분배, 교육사업과 언론운동을 펼쳤다. 무관학교 졸업 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18년 만주로 망명, 무오 독립선언에 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역임하였고,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 2020. 10. 26.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홍범도 홍범도 ★ 홍범도(洪範圖, 1868~1943) : 조선 말기의 의병장,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군인.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다. 1895년부터 의병 활동을 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잠입하여 일본군을 습격하였고,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봉오동 전투), 청산리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 2020. 10. 25.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청산리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일본군 청산리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일본군 ★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이라고도 한다. 1920년 10월 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 일제는 중국 마적일 일으킨 훈춘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였고,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 2020. 10. 25.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 ★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이라고도 한다. 1920년 10월 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 일제는 중국 마적일 일으킨 훈춘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였고,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한국 독립군이 러시아로 건너.. 2020. 10. 25.
[일제강점기/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외교 책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외교 책자 ★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4월 11일 ~ 1948년 8월 15일) :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 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으며,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 2020. 10. 24.
[일제강점기/임시정부]상하이의 임시정부 청사 상하이의 임시정부 청사 ★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4월 11일 ~ 1948년 8월 15일) :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 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으며,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2020. 10. 24.
[일제강점기/대한제국및황실] 고종의 장례 고종의 장례 ★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다. 공식적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이지만, 아직까지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독살설이 퍼지면서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2020. 10. 24.
[일제강점기/독립운동]대한국 노인 연맹단 명부 대한국 노인 연맹단 명부 ★ 대한국노인연맹단 : 이라고도 한다.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 운동 이후 한국의 노인들이 동지 규합과 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신한촌 덕창국(新韓村 德昌局)에서 결성하였으며, 46세 이상 70세까지의 남녀 노인으로 구성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사업을 지원, 협조하였다. 단장 김치보(金致寶), 고문 이순(李舜), 재무 천수점(千手漸) 등이었고, 1919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요하현 지부장이었다. 2020. 10. 22.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강우규 의사의 묘 강우규 의사의 묘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 강우규(姜宇奎, 1855~1920) :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으나, 일제 관헌 및 추종자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도피하였으나 친일파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서 붙잡혀 수감되었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2020. 10. 21.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재판과 기사 강우규 의사의 재판과 기사 강우규 의사의 재판(왼쪽)과 신문기사(오른쪽) 재판에 출두하는 강우규 의사 ★ 강우규(姜宇奎, 1855~1920) :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으나, 일제 관헌 및 추종자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도피하였으나 친일파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서 붙잡혀 수감되었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2020. 10. 21.
[일제강점기/의열투쟁] 강우규 의사 동상(구 서울역사) 강우규 의사 동상 (구 서울역사) ★ 강우규(姜宇奎, 1855~1920) :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으나, 일제 관헌 및 추종자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도피하였으나 친일파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서 붙잡혀 수감되었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2020. 10. 21.
[일제강점기/의열투쟁] 강우규 의사의 수형 기록 카드 강우규 의사의 수형 기록 카드 ★ 강우규(姜宇奎, 1855~1920) :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으나, 일제 관헌 및 추종자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도피하였으나 친일파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서 붙잡혀 수감되었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2020. 10. 20.
[일제강점기/의열투쟁] 강우규 의거 신문기사(LA Times) 강우규 의거 신문기사 (LA Times) ★ 강우규(姜宇奎, 1855~1920) :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으나, 일제 관헌 및 추종자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도피하였으나 친일파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서 붙잡혀 수감되었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2020. 10. 20.
[일제강점기/의열투쟁] 강우규 의거 신문기사(동아일보) 강우규 의거 신문기사 (동아일보) ★ 강우규(姜宇奎, 1855~1920) :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으나, 일제 관헌 및 추종자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도피하였으나 친일파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서 붙잡혀 수감되었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 저작권 문제가 있을 때는 삭제하겠습니다. 2020. 10. 20.
[일제강점기/의열투쟁] 강우규 강우규 ★ 강우규(姜宇奎, 1855~1920) :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으나, 일제 관헌 및 추종자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도피하였으나 친일파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서 붙잡혀 수감되었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2020. 10. 19.
[일제강점기/3.1운동]제암리 학살 사건의 유족들 제암리 학살 사건의 유족들 ★ 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 : 일제강점기인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뒤, 3월 31일 발안 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려 만세운동은 계속하였다. 일본 경찰은 총칼로 시위를 진압하고 제암리 일대에서 검거 ․ 토벌 작전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지인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4월 15일 “만세운동 과잉 집안에 대한 사과”를 빌미로 주민들은 교회에 모아 놓고, 총을 쏘고 교회에 불을 질러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제암.. 2020. 10. 16.
[일제강점기/3.1운동]제암리 학살 사건 제암리 학살 사건 ★ 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 : 일제강점기인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뒤, 3월 31일 발안 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려 만세운동은 계속하였다. 일본 경찰은 총칼로 시위를 진압하고 제암리 일대에서 검거 ․ 토벌 작전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지인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4월 15일 “만세운동 과잉 집안에 대한 사과”를 빌미로 주민들은 교회에 모아 놓고, 총을 쏘고 교회에 불을 질러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제암리 학살을.. 2020. 10. 15.
[일제강점기/3.1운동]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재현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재현 ★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병천 시장에서 3,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과 헌병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진압을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죽은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2020. 10. 15.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유관순의 수형표 유관순의 수형표 ★ 유관순(柳寬順, 1902~1920) :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이화학당 재학 중,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교도소 내 가혹행위로 인해 1920년 9월 28일에 사망했으며, 2013년에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되어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에 사적 제230호로.. 2020. 10. 15.
[일제강점기/3.1운동]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33인 ★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 :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 각 15명, 16명, 2명씩 참가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태화관(종로구 소재)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고, 총독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들 대다수는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2020.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