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우일모 九牛一毛
아홉 마리 소의 털 한가닥이라는 뜻으로, 수많은 것 중 아주 적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한나라(漢)는 오랫동안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흉노를 달래기 위해 공주를 시집보내고 세폐(歲幣)를 바쳤다. 한무제(漢武帝 ; 전한 7대 군주)는 이 정책을 폐기하고 흉노와 전쟁을 벌였다.
이 때, 이릉 장군은 보병 5,000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는데 열 배가 넘는 흉노의 기병과 맞닥뜨렸다. 10여 일 동안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패하고 말았다.
흉노로 시집가는 왕소군(王昭君)
중국 4대 미녀 중 한 사람으로
원제의 후궁이었으나 흉노를 달래기 위해 흉노에 보내져 선우(흉노 황제)의 알씨(흉노 황후)가 되었다.
한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흉노에 공주와 공물을 바쳤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이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환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을 참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중신들은 무제 눈치만 보며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지 않았다.
이때 사마천이 나서 이릉을 변호했다. 사마천은 흉노가 두려워하던 명장 이광의 손자인 이릉을 충성스러운 용장이라고 믿었고 역사학자로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사마천 (司馬 遷)
“이릉은 5천명의 보병을 이끌고 수만명의 흉노 기병과 싸웠습니다. 원군도 오지 않고 탈영하고 배신하는 군사들고 속출하여 어쩔 수 없이 진 것입니다. 이릉이 흉노에 항복한 것도 훗날 황은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일 것이니,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고 이릉 일족의 형벌을 거두어 주십시오.”
무제는 불같이 노하여 사마천을 궁형에 처하라 명했다. 궁형은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것으로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이릉의 화(李陵之禍)’라고 일컫었다.
사마천은 친구 임안 편지를 보내 ‘최하급의 치욕’을 당했다고 하며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아 죽는다 해도 그것은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털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네. 지금 내가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더욱이 세상 사람들은 내가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여기기는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이 편찬하던 역사서 <사기史記>를 집필하고 있었다. ‘통사(通史)를 기록해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야 했기에 사마천은 치욕을 참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사기史記>를 편찬해 내었다.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사서(史書)이자 불후의 명저로 꼽히고 있다.
중국 최초의 사서 사기(史記)
이후 구우일모는 수많은 것 중 아주 작은 하나를 이르게 되었다.
- 출전 : 한서 보임안서(漢書 報任安書) 문선 사마천보임소경서(文選 司馬遷 報任少卿書)
- 한자풀이
구(九) : 아홉
우(牛) : 소
일(一) : 하나
모(毛) : 터럭, 털
- 유의어 : 창해일속(滄海一粟), 창해일적(滄海一滴), 대해일적(大海一滴)
사기(史記)
전한(前漢)의 역사가인 사마 천(司馬 遷)이 지은 역사서로 신화시대부터 전한의 한무제(漢武帝) 때 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사기의 서술 방식인 기전체는 동아시아에서 역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사마천(司馬 遷, B.C. 145년 ~ B.C. 86년)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로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의 관직을 물려받아 태사령(太史令)으로 복무하였다. 흉노에 투항한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宮刑)을 받았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사기(史記)>를 편찬하였다.
이릉(李陵, B.C. ~ B.C. 74년)
전한 무제 때의 장군으로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많이 세웠다. B.C. 99년, 흉노와 전투에서 패하였고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투항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모두 참살하였다.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에 처해졌다.
한무제 (漢武帝, B.C. 156년 ~ B.C. 87년)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B.C. 141년 ~ B.C. 87년)로 유학을 진흥하고 외척의 발호를 억눌러 왕권을 강화했다.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였으며, 전한의 전성기를 구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