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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250

[일제강점기/인적수탈] 강제 징용 강제 징용 ★ 일제강점기의 강제 징용 :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 을 공포하고 실시하였다. 한국 노동자들의 직업 선택권을 빼앗고 일본의 필요에 따라 강제 노동을 시켰다. 한국 노동자들은 사할린 섬이나 동남아시아, 남양군도 등에서 탄광, 군사기지 및 철도 건설에 동원되어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전후 전범으로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은 현재까지 일제의 강제징용을 부인하고 있다. 2021. 2. 22.
[일제강점기/경제수탈] 금속 공출 금속 공출 ★ 공출(供出) : 물자의 자유로운 유통을 막고 할당받은 물자를 의무적으로 정부에 판매 또는 헌납하도록 강제하는 제도.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인적 ․ 물적 자원 수탈을 법제화하였고, 미곡(米穀)을 비롯한 식량과 금속류 등, 다양한 물자를 약탈하였다. 2021. 2. 22.
[일제강점기/경제수탈]일제의 식량 수탈 일제의 식량 수탈 산미증식계획으로 증산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항구에 쌓아놓은 모습 ★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 : 일제가 일본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고자 실시한 정책으로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실시되었다. 일제는 쌀 생산이 목표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증산량보다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 한국의 소작농이 몰락하고 화전민이 증가하였다. 일본에서는 쌀 가격 폭락으로 일본 농촌 경제가 악화되어 1934년 중단되었다. 2021. 2. 21.
[일제강점기/경제수탈] 남면북양 정책 남면북양 정책 ★ 남면북양 정책(南棉北羊政策) :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한국의 농민에게 강요한 정책으로 일본의 공업 원료 증산 정책이다.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면화를 재배하게 하고 북쪽에서는 가구당 5마리씩 양을 사육하게 한 것으로, 산미증식계획 실패를 대체할 식민지 정책이다. 한반도를 값싼 원료 공급기지로 삼아 일제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경제대공황의 여파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2021. 2. 21.
[일제강점기/사회운동]일장기 말소 사건 일장기 말소 사건 ★ 일장기 말소 사건(日章旗抹消事件) : 193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지방판 조간 2면 및 조선중앙일보의 4면, 동아일보의 8월 25일자 2면에 1936년 하계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우승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사장 및 주필, 편집국장 등이 사임하였고, 관련자가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다. 2021. 2. 10.
[근현대/친일파] 이병도 이병도 ★ 이병도(李丙燾, 1896~1989) :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대학 교수, 저술가였던 정치가.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하였다. 1934년 진단학회를 창설하였다.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에 수록되었다. 2021. 2. 9.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 일본의 아나키스트, 한국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부인.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1912년 한국의 충청북도의 친척에게 맡겨져 자랐으며, 3.1 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에 공감하였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와 사회주의자와 교류하며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2년 박열과 함께 살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일본을 비판하였다. 1923년 남편 박열과 함께 일본 황태자 암살 기도 혐의로 체포되어 1926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26년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2021. 2. 8.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박열 박열 ★ 박열(朴烈, 1902~1974) : 한국의 아나키스트, 사회운동가. 학생 시절 3.1 운동에 참여하여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유학한 뒤,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사망하였으나 박열은 22년을 복역하고 광복 후 풀려났다. 이후 일본에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전신)을 조직하였고 이승만을 지지하였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하였다. 정부수립 후 위국하여 한국독립당 당무위원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6.25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2021. 2. 8.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한용운 한용운 ★ 한용운(韓龍雲, 1879~1944) :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으며, 불교 개혁과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 창설하고 활동하기도 했다. 광복을 1년을 앞둔 1944년 병사하였다. 저서로 , 등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021. 2. 7.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조명하 조명하 ★ 조명하(趙明河, 1905~1928) :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공무원(읍서기)로 잠시 일하다가 일본에 유학하던 중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타이완에 들렀다(1927). 일왕의 장인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타이완에 방문했을 때 독을 바른 단검으로 찔렀으며(1928년 5월 14일), 구니요시는 이듬해 1월 독이 퍼져 사망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당시 24세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021. 2. 7.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이봉창 이봉창 ★ 이봉창(李奉昌, 1900~1932)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10년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상인으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의 단원이 되었다. 1932년 일본에 건너가 쇼와 일왕을 폭탄으로 저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1월 8일).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이 언도되었으며, 1932년 10월 10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복 후 유해를 봉환하여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화 함께 안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2021. 2. 6.
[일제강점기/친일파] 최린 최린 ★ 최린(崔麟, 1878~1958) :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 3.1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친일 인사로 변절했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병보석을 풀여났고,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선전기관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한 뒤 행방을 알려지지 않았다. 1958년 사망하였다. 2021. 2. 5.
[일제강점기/친일파] 최남선 최남선 ★ 최남선(崔南善, 1890~1957) : 한국의 문화운동가. 대한제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으나 1907년 와세다 대학 재학 중 동맹 휴학 사건으로 인하여 퇴학 처분되어 귀국했다. 여러개의 잡지를 발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당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 낭독하였다. 이후에도 잡지를 발간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친일 로 변절하였다. 1957년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2021. 2. 5.
[근대/독립운동가] 안창호 안창호 ★ 안창호(安昌浩, 1878~1938) :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해산 후 교육운동을 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다. 특히 교육과 실력 양성 운동을 활발히 하여 점진학교, 대성학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본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고 출옥 직후 고문 후유증과 여러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2021. 2. 4.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손병희 손병희 ★ 손병희(孫秉熙, 1861~1922) :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1882년 동학에 입도하고 3년 뒤,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관군에 맞서 싸웠으나, 동학농민혁명 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워 1897년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다. 이후 개화 사상을 받아들여 근대화 운동을 펼치다가, 정부의 동학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메이지유신으로 변화한 일본을 보고 단체를 조직하여 개화운동을 하였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천도교 재부의 친일 인사를 내보내고 교육과 출판 사업을 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2021. 2. 4.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김익상 김익상 ★ 김익상(金益相, 1895~1943) : 한국의 독립운동가.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교직에 종사하던 중, 1920년 중국의 펑톈(奉天)지점으로 전근갔다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을 계획하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하여 1921년 조선총독부 청사 비서실에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은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1922년 중국에 시찰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고자 동료들과 권총으로 사격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다. 일본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0년 복역한 뒤 1943년 출소, 귀국하였으나 다시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 2021. 2. 3.
[일제강점기] 님 웨일스 님 웨일스 ★ 님 웨일스(Nym Wales, 1907~1997) : 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Helen Foster Snow). 미국의 저널리스트로, 님 웨일스는 필명이다. 1930년대 중국 혁명가들을 취재하여 저서를 남겼으며, 옌안(延安)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 김산을 취재하고 김산의 전기 을 저술하였다. 은 조직 보호를 위해 한동안 출판을 미뤄달라는 김산과의 약속을 지키기 1941년 미국에서 펴냈다. 2021. 2. 2.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김산 김산 ★ 김산(金山, 1905~1938) :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가, 항일독립투사, 아나키스트, 국제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 본명은 장지학 또는 장지락. 어려서부터 아나키스트로 활동하였고, 1921년 중국으로 건너가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 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한 뒤, 중국 공산당과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만주, 일본, 북경, 광동 등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였다. 194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가 김산의 전기 을 출간하였다. 2021. 2. 2.
[일제강점기/의열투쟁]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 사건에 사용한 폭탄(모형)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 사건에 사용한 폭탄(모형) (물통, 도시락 폭탄) ★ 훙커우 공원 사건(虹口公園事件) :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왕의 생일(천장절) 행사와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 중에 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본의 주요 인사 여러명이 죽고 다친 사건이다. 윤봉길 의사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이 사건 이후 중국 국민당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2021. 1. 7.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윤봉길 윤봉길 ★ 윤봉길(尹奉吉, 1908~1932) : 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시인 겸 저술가. 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계몽활동과 교육운동을 하였다.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 요인 여러명이 죽고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뒤 사형을 선고받았고,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당시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냈다”며 극한했고,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2021.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