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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노동운동]암태도 농민항쟁 사적비 암태도 농민항쟁 사적비 ★ 암태도 소작쟁의(巖泰島小作爭議) :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 사이에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신안군 암태면) 암태도의 소작농들이 벌인 농민항쟁. 조선시대 왕족의 사유지였던 암태도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과 친일파 지주가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였다. 지주들은 1920년대에 총독부의 저미가정책으로 손해를 보자 소작료 5~8할 올렸다. 농민들은 를 조직하여 소작료 인하와 추수 거부, 소작료불납 등으로 저항하였다. 지주들은 일본경찰을 동원하여 탄압하였으나 농민들은 끝까지 싸워 승리하였다. 이후 서해 다도해 지역에서 다수의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2021. 3. 1.
[일제강점기/일제의탄압과만행]일제강점기의 신문 검열 일제강점기의 신문 검열 ★ 3.1운동 이후 일제의 통치방식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뀐 뒤, 한국인의 고등교육과 신문 ․ 잡지의 출간과 언론활동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검열과 정간 ․ 폐간 등으로 한국인의 언론 활동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2021. 3. 1.
[일제강점기/언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행각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행각 ★ 일제강점기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행각 :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전환하며 민간신문 발간을 허가하여 창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20~30년대에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지원하였으나, 1936년 이후 항일 활동이 줄고, 점차 친일로 변절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정간을 당하였다가, 광복 후 복간되었다. 2021. 2. 28.
[일제강점기/언론]조선일보 창간호 조선일보 창간호 ★ 일제강점기의 조선일보 :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고, 이 정책의 일환으로 1920년 한국인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는데, 이 중 하나가 조선일보이다(1920년 창간). 1920 ~ 30년대에는 을 지원하는 등의 항일 운동과 사회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나, 1936년부터 총독부의 개입으로 항일 성향이 줄어들었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정간을 당하였다가, 광복 후 복간되었다. 2021. 2. 28.
호수 호수 2021. 2. 27.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사격 훈련 중인 한국 광복군 사격 훈련 중인 한국 광복군 ★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 :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 국군.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만주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1940년 9월 결성하여되었다.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각군의 통수권을 인수하여 통합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과 독이레 선전포고하고 영국군과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CIA의 전신인 OSS의 특별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귀국하였다. 2021. 2. 27.
[일제강점기/독립운동]혁신공보 혁신공보 ★ 혁신공보(革新公報) : 일제강점기의 항일비밀결사조직 의 기관지 2021. 2. 27.
해넘이 106 해넘이 106 2020년 11월 30일 2021. 2. 26.
[일제강점기/민족말상정책] 궁성요배 궁성요배 ★ 궁성요배(宮城遥拝) : 일왕의 궁성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하던 일본 예법.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 주민(대만, 만주국)에게 강요하였으며, 2차대전 중에는 더욱 극심하였다. ★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 : 일본이 일제강점기 193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사라지게 하여 최후까지 전쟁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 와 등을 내세우며 ,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치 참여와 교육 확대 등은 외면하고 차별은 개선하지 않았다. ★ 황국신민화 정책(皇國臣民化) : 일본이 1930년대 후반부터 실시한 의 일환으로 한국인이 일본의 신민이 되어 일왕에게 충성을 강요하였다. 이 정책은 2차대전 발발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신.. 2021. 2. 26.
해넘이 105 해넘이 105 2020년 11월 14일 2021. 2. 25.
[일제강점기/민족말상정책]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한국 어린이들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한국 어린이들 ★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이 실시한 민족말상정책의 일환인 중 하나이다. 1937년에 만들어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로 ‘일본과 일왕에 대한 충성 맹세’가 내용이다. 학교를 비롯한 관공서, 은행, 공장, 상점 등 모든 직장의 조회, 기타 회합 등에서 제창하도록 강제하였다. ★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 : 일본이 일제강점기 193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사라지게 하여 최후까지 전쟁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 와 등을 내세우며 ,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치 참여와 교육 확대 등은 외면하고 차별은 개선하지 않았다. ★ 황국신민화 정책(皇國臣民化) : 일본이 1930년대 후반부터 실시한 의.. 2021. 2. 25.
[일제강점기/사회운동] 형평사 운동 포스터 형평사 운동 포스터 ★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 :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 당시 백정은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받았다. 1923년 4월,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큰 호응을 받았다.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지만, 내부 분열과 일제의 압력으로 10여 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2021. 2. 25.
[일제강점기/민족말상정책] 내선일체 포스터 내선일체 포스터 ★ 내선일체(内鮮一体) :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일본에 완전히 통합하고자 내세운 표어로, 곧 내지(內, 일본)와 조선(鮮)이 한 몸이라는 뜻이다.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을 사라지게 하여 일본으로 편입시키려 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이었으나,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지 않았다. ★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 : 일본이 일제강점기 193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사라지게 하여 최후까지 전쟁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 와 등을 내세우며 ,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치 참여와 교육 확대 등은 외면하고 차별은 개선하지 않았다. 2021. 2. 24.
[일제강점기/언론]동아일보 창간호 동아일보 창간호 ★ 일제강점기의 동아일보 :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고, 이 정책의 일환으로 1920년 한국인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는데, 이 중 하나가 동아일보이다(1920년 창간). 초대 대표는 김성수였으며, , , 를 사시(社是)로 내세웠다. , , 등의 민족운동을 지원하였다. 으로 무기한 정간을 당하였고, 1940년 폐간되었다. 광복 후, 복간되었다. 2021. 2. 24.
[일제강점기/민족교육운동]조선민립대학기성회 조선민립대학기성회 ★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반의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교육에 맞서 민족 대학 설립을 목표로 하였다. 1923년 를 결성하여 모금운동을 펼쳤으나,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2021. 2. 24.
삼색이 삼색이 2021. 2. 23.
[일제강점기/실력양성운동] 문자보급운동 문자보급운동 ★ 문자보급운동 : 일제 강점기인 1920~3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실력양성 운동으로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였다. 지식인과 학생들이 야학 설립을 통한 한글 교육과 민족정신 고양운동을 하였다. 조선일보의 문맹퇴치 운동,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 등이 이 운동의 일환이다. 이 운동이 민족교육운동을 확대되어 가자 일제는 1935년 금지하였다. 2021. 2. 23.
[일제강점기/실력양성운동] 브나로드 운동 브나로드 운동 ★ 브나로드 운동 : 1930년대 초에 일어난 한국의 학생 운동으로 농촌 계몽운동이다. 농촌에 학교를 세우고 성인을 위한 야학을 설치하여 문자와 수학 등의 기초 학문을 교육하였다. 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 운동을 전개하고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는 “민중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이다. 2021. 2. 23.
[일제강점기/인적수탈] 강제 징병 강제 징병 ★ 일제강점기의 강제 징병 :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기 위해 1938년 을 제정하였고, 중일전쟁 이후 1938년부터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인을 입대시켰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4년 징병제를 실시하여 한국 청년들은 전쟁으로 내몰았다. 2021. 2. 22.
[일제강점기/인적수탈] 강제 징용 강제 징용 ★ 일제강점기의 강제 징용 :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 을 공포하고 실시하였다. 한국 노동자들의 직업 선택권을 빼앗고 일본의 필요에 따라 강제 노동을 시켰다. 한국 노동자들은 사할린 섬이나 동남아시아, 남양군도 등에서 탄광, 군사기지 및 철도 건설에 동원되어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전후 전범으로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은 현재까지 일제의 강제징용을 부인하고 있다. 2021.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