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을 볼 때면 집집마다 온돌에서 생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한 방 안에는 장롱(欌籠)을 비롯한 각종 가구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와 그 이전에 사용하던 가구는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 이후에 사용하던 가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온돌의 보급에 따라 생활환경이 입식에서 좌식 위주로 바뀌면서 가구의 형태 역시 크게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사용했던 가구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가구의 역사
가구는 건물에 부속하는 설비 기구이자 실내에 배치하여 생활에 사용하는 도구를 총칭하는 것으로, 물건을 넣어두는 수납용 가구,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용 가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식용 가구 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의미의 가구는 의자, 책상 등 움직일 수 있는 것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건물에 붙여 만든 옷장, 벽난로는 물론이고 가로등이나 우체통과 같은 옥외의 용구, 커튼, 쿠션 등 직물 제품도 포함된다.
가구는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물건을 저장하거나, 휴식이나 작업을 위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제작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신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도 만들어졌다. 최초로 집안에서 사용한 가구는 기원전 3,100년〜2,500년경 스코틀랜드 북쪽에 위치한 오크니(Orkney) 제도의 스카라 브레(Skara Brae)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견된 돌로 만든 일종의 장식장을 들 수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집집마다 돌침대 2개씩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사리 등으로 만든 매트리스를 얹고 그 위에 동물 가죽을 씌워 사용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상아, 나무 등으로 만든 가구를 사용했고, 일반인들은 갈대와 풀로 엮어 만든 의자, 식탁, 상자, 물건 걸이, 가리개 등을 사용했다. 의자, 침대, 상자 등의 가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스, 로마 등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사용되어 지금까지도 그 기본형태에 변함이 없이 이어져 왔다.
가구는 주택양식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중국의 경우는 돗자리 문화의 영향 탓에 식사는 야트막한 식탁에서 했고, 침대가 없이 생활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문헌에 등장한 삼국시대의 가구
가구에 관한 기록 가운데 우리 역사상 가장 이른 것은 건국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석씨의 시조인 석탈해는 신라 해변가에서 나무로 짠 궤인 독(櫝) 안에서 발견되었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역시 금색의 작은 궤(金色小櫝)에서 발견되었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는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閤) 안에 놓인 알에서 태어났다. 금합은 문이 달린 작은 상자다. 곡식이나 제사 도구, 책, 귀금속, 옷 등 다양한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된 네모난 가구인 궤는 크기에 따라 궤(櫃), 갑(匣), 독(櫝)으로 구분되는데, 신라나 가야의 건국신화에 등장한 것을 보아 사용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의 김수로왕이 태어났을 때 아도간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를 상(床)에 앉혔다. 그리고는 절을 하며 예를 올리고 공경했다고 하는데, 이때의 상은 사람이 걸터앉거나 물건을 올려둘 수 있는 평상(平床), 또는 좌상(座床)이라고 하겠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 편에는 보양법사(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를 도운 이목(螭目)이 천제(天帝)의 노여움을 받아 천제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보양법사가 이목을 상(床)밑에 숨겨주는 장면이 있다. 이때의 상은 침상(寢牀- 누워서 잘 수 있게 만든 평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혜동진(二惠同塵)’ 편에는 혜숙(惠宿) 스님이 여자 침상(婦床)에 누워 잠을 자자, 궁중의 관리(中使)가 이를 보고 더럽게 여겨 그대로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에는 침상이 남성용, 여성용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신수공(眞身受供)’ 편에서는 697년 효소왕이 망덕사(望德寺) 낙성회(落成會)에 직접 참석하여 공양을 했다. 이때 몹시 허술한 모양을 한 스님이 참석하기를 원하자, 왕은 그를 말석(床杪)에 참석하게 했다. 행사장에 많은 상을 펼쳐 놓고 여러 사람들이 신분에 따라 차례로 앉아서 행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가구가 없는 것은 가난의 상징
[삼국유사] ‘조신(調信)’ 편에는 조신의 집은 사방이 벽 뿐이었고(家徒四壁), 거친 음식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어 사람의 꼴이 보잘것없어져 사방으로 구걸하러 다니게 되었다는 글귀가 등장한다. 가난의 상징으로 방에 가구가 없이 오로지 벽만 있다고 언급한 것은, 당시 대부분의 집에서는 가구를 갖추고 살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가구에 대한 사치 금지
834년 신라 흥덕왕은 신분에 따라 금지해야 할 물품을 정한 사치금지령을 발표했다. [삼국사기]의 [잡지] ‘옥사(屋舍)’조에는 주렴 가장자리(簾緣), 병풍, 상(床)에 대한 규제 조항이 보인다.
주렴은 휘장(Curtain)으로, 신라 시대에는 예전의 집에는 집집마다 휘장이 있어서 바람을 막아주면서 보온의 기능을 담당했다. 신라에서는 신분에 따라 휘장을 만드는 데 비싼 실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수를 놓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상은 침상을 비롯해 평상, 좌상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귀족들은 대모(玳瑁-바다거북 등딱지), 자단(紫檀), 침향(沈香)으로 장식하며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 상은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가구였다. 또한 병풍에 수(繡)를 놓지 말라는 규정이 있는 것은 당시 병풍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무덤에서 발견된 가구
삼국시대 초기 유적인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대나무 상자(竹篋)가 출토된 바 있다. 대나무 상자는 목재가구에 비해 만드는 기술과 공정이 단순해, 물건을 넣어두는 가구 가운데는 비교적 일찍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 1∼2세기 낙랑시대 무덤인 채협총에서도 채화칠협(彩畵漆篋)이라 불리는 길이 약 40㎝ 정도의 대나무 광주리가 출토되었는데, 효자전설을 소재로 한 100명 가까운 인물 그림이 상자에 그려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유물들은 대나무 등을 얽혀 만든 상자가 일찍부터 물건을 보관하는 가구로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태왕릉(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정)에서는 금박을 한 상다리 4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제사상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금의 무덤에서 제사를 올린 만큼, 많은 음식이 놓일 제사상은 당연히 필요했다. 또한 백제 무령왕(501〜523)의 무덤에서는 목관과 함께 베개, 발받침이 발견되었고, 신라 은령총에서는 칠을 한 상자(函)가 발견된 바 있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가구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보다 더 많은 가구를 보여주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다. 고분벽화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정사를 보는 장면을 형상한 그림이 있다. 그런데 벽화 속 사람들은 맨바닥이 아니라, 상(床)에 앉아 있다. 상의 가장 간단한 형태는 넓은 평상이다. 약수리 고분의 서쪽 벽에는 평상 위에 무릎을 꿇고 일렬로 앉아 있는 다섯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개인이 단독으로 앉은 독상(獨床)도 많이 볼 수 있다. 무용총의 천장 벽화에는 화려한 장식을 한 평상에 앉은 귀족과 장식이 없고 크기도 작은 평상에 앉은 사람을 함께 볼 수 있다.
안악3호분 남녀 주인공과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은 평상 위 3면에 난간이 있고, 네 귀둥이에 기둥이 세워져 지붕이 있으며 휘장이 둘러친 장방(帳房)에 앉아 있다. 장방은 침실로 사용이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