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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한국사일반공통

신발

by hwawoon 2011. 11. 21.

 

 

 

신발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뜨거운 사막의 모래, 차가운 눈밭, 거친 가시밭과 자갈밭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신발은 최초의 실용적인 교통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우리 또한 신발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는 신발을 신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은 왜 신발을 신게 되었고, 우리 조상들은 어떤 신발들을 신었던 것일까?

 

 

신발의 기원

인류가 언제부터 신발을 신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류가 바늘을 발명하여 옷을 최초로 만들어 입었던 것이 약 2만 5천 년 전인만큼, 이 무렵부터 신발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는 약 2만 년에 만든 가죽 모카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추위를 극복하고 뜨거운 햇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만들어졌듯이, 신발 역시 동상을 방지하기 위해 혹은 바닥의 열기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추운 곳과 뜨거운 사막 지역에서 먼저 발전하게 되었다. 신발은 나무껍질이나 풀, 짐승의 가죽이나 털을 이용해 발을 묶어 싸던 것에서 시작하여 차츰 정해진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신발을 벗는 것이 예의?

이집트에서는 약 3,100년 무렵의 왕이 신던 샌들이 발견된 바 있다. 이것은 식물 섬유로 만든 것인데, 당시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샌들을 벗는 것이 예절이었다. B.C 14세기 투탕카멘 왕의 샌들을 살펴보면 나무 밑창에 가죽, 목피, 금과 구슬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샌들 장식에는 걸을 때마다 짓이겨 뭉갠다는 의미에서 적의 모습을 그려놓기도 했다. 구두창이 없고 발을 감싸는 부드러운 가죽신인 부츠는 아시리아(BC 1200〜540)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이 무렵 말을 탄 기병이 등장하는데, 부츠는 기병들이 말을 타고 이동하기 쉽도록 개발된 것이다.

 

로마 시대에는 직업에 따라 색깔이 다른 샌들을 신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신발에도 신분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서는 신발을 만드는 제화공이 인기 직업이기도 했다. 11세기말 중세 유럽에서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구두가 처음 등장하면서부터 신발의 종류는 다양하게 늘어갔다. 신발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발전의 계기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1858년 제화용 재봉틀이 발명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세기 미국에서 고무로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다양한 기능성을 갖춘 신발, 패션의 완성을 돕는 멋진 디자인 제품들이 등장하여 보다 많은 신발들이 소비되고 있다.

 

 

한국의 신발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신발은 B.C 7세기경 고조선의 무덤인 심양시 정가와자 6512호 무덤과 요동반도 남단의 누상무덤 무덤 주인의 다리에 놓여 있는 수많은 청동 단추가 달린 가죽장화를 들 수 있다. 여기서 단추가 달린 가죽장화를 신었다는 것은 이 보다 앞서 신발이 발전해왔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고조선 다음으로 성립된 부여에 대한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은 신발(履)로 혁탑(革鞜)을 신었다고 하였다. 혁탑은 발목이 비교적 짧은 형태의 가죽신이다. 그런데 마한의 경우 [삼국지]에서는 ‘가죽신을 신어 민첩하게 다닌다(足履革蹻蹋)’고 했지만, [후한서]에서는 ‘짚신(草履)을 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죽신과 짚신

우리 고유의 신발을 대표하는 짚신. 농경사회에서 흔한 재료였던 볏짚으로 삼은 신으로, 마한시대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고유 신발은 가죽신인 ‘화(鞾, 靴)’와 짚신인 ‘초혜(草鞋)’, 나무로 만든 ‘나막신’ 등이 있었다. 사냥을 자주 하여 짐승의 가죽이 풍부한 데다 자주 말을 타야 하는 북부 지방에서는 가죽신을 발전시킨 반면, 말을 적게 탔고 가죽 제품이 적은 남쪽 사람들은 풍부한 짚으로 짚신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짚신은 보이지 않고, 목이 길거나(靴)과 짧은(鞾) 가죽신이 보인다. 목이 긴 가죽신은 말을 탈 때 사용했고, 짧은 것은 평상시에 신었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도 전파된 ‘혜(鞋)’는 목이 짧고 앞이 높이 들린 모양인데, 고구려 사람들의 신발은 앞부분이 들어 올려 진 것이 적고, 모양은 조금 뾰족한 형태로 중국의 신발과는 다르다. 가죽신은 오래 신을 수 있고, 착용감 등이 좋기 때문에 마한, 백제, 신라에서도 귀족들을 중심으로 신었다. 신라에서는 가죽신을 만드는 화전(靴典), 탑전(鞜典), 미투리를 만드는 마이전(麻履典) 등의 관청을 두어 왕실과 의례에 필요한 신발을 생산하기도 했다.

 

짚신의 경우 부여 궁남지 유적, 관북리 유적에서 60점 이상 출토된 바 있다. 6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백제시대 짚신은 형태 면에서 신발 바닥만 있는 오늘날의 샌들에 가까운 형태로 일본 짚신과 유사하다. 발굴자는 백제 짚신의 제작 전통이 일본에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또한 제작기법이 섬세하고, 오늘날 미투리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신발의 주인공은 평민 보다는 신분이 높은 계층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짚신의 재료도 볏짚이 아닌 저습지에서 자라는 풀인 ‘부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들로 짚신을 만드는 전통은 어느 시점에서 단절된 듯하다.

 

 

 

삼국시대 짚신은 이외에도 아산 갈매리, 이성산성, 경주 황남동, 대구 동천동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한반도 중남부 지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신던 신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라 시대 유물인 이형토기(異形土器)에 나타난 짚신은 오늘날 짚신과 큰 차이가 거의 없다. 짚신은 오래 신기 어렵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서민들은 집에서 만들어 신었고, 귀족들에게는 전문 장인들이 부들 짚신 등을 따로 만들어 공급했을 것이다.

 

 

다양한 재료로 만든 신발

신발의 재료는 가죽, 짚, 나무 이외에도 실크(紗, 羅, 綾, 緞), 종이, 흙, 금속 등이 사용되었다. 고구려 악공들은 적피화(赤皮靴: 붉은 가죽신)를 신었고, 춤추는 이는 오피화(烏皮靴: 장화모양의 검정 가죽구두)를 신었다. 이를 통해 삼국시대에 이미 염색을 한 가죽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생가죽을 들기름에 절여 신을 만들면, 비오는 날이나 흐린 날에도 신을 수 있었다. 또 가죽 바닥에 징을 촘촘히 박아 징신을 만들어 신기도 했다. 실크와 가죽을 이용해 만든 당혜, 운혜, 태사혜 등은 주로 상류층에서 신는 신발이었다.

 

나막신의 경우도 아산 갈매리 유적, 경산 임당동 유적과, 6∼7세기 신라시대에 조성된 안성의 죽주산성 집수시설에서 발견된 바 있다. 죽주산성에서 발견된 신발은 앞부분이 막혀있어 일반적인 나막신과 좀 다르다.

 

리움미술관에는 보물 556호로 지정된 흙으로 만든 신발인 토리(土履)가 소장되어 있다. (길이 23.5∼24㎝, 폭 6.8∼7.5㎝, 높이 6.8∼7.2㎝) 대체로 6세기 경 가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죽신발을 모방해서 흙으로 만든 것이다. 발의 앞쪽이 두툼하고 투박하게 솟아 있고, 둘레에는 일정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끈으로 조일 수 있게 했으며, 뒤꿈치는 가죽을 덧댄 형태로 약간 솟아 있어 손으로 잡고 신을 수 있게 했다. 당시에도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었던 것이다.

 

백제 무령왕릉 등에서는 바닥에 압정이 달린 금동신발이 출토된 바 있다. 이 신발은 무려 30cm에 가까워 실제로 신지 않은 신발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고구려 삼실총, 통구12호분 벽화에도 신발 아래에 못이 달린 신발이 그려져 있다. 기병이 적을 타격하는 무기로 못 신발을 사용하였고, 보병이 눈 쌓인 길이나, 진창길을 갈 때도 사용했을 것이다.

 

 

고구려 삼실총 고분 벽화에서 못이 달린 금동신발을 신은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금동신발의 실물사진

 

 

경주 식리총에서 발견된 신발 바닥의 화려한 장식

아산 갈매리 유적에서 출토된 짚신

 

 

 

신라의 수도 경주 노동동에 위치한 식리총에서 발견된 금동 신발의 바닥에는 거북등무늬 안에 짐승얼굴무늬와 새, 기린,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하늘을 난다.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신발처럼 상징적 의미를 담아 신발에 새긴 것이라면, 식리총 금동신발의 주인공은 신발을 신고 하늘로 승천하려는 욕망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양직공도의 신발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 사신(왼쪽 그림)과 낭아수국, 왜국, 구자국 사신(오른쪽 그림의 왼쪽부터)의 모습.

 

 

526〜539년에 그려진 <양직공도(梁職貢圖)>라는 그림에는 남중국의 양나라를 방문한 백제를 비롯한 12나라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백제 사신은 가죽신을 신고 있는 반면, 왜국 사신은 신발을 신지 않고 있다. 그림에는 왜국 외에도 낭아수국(狼牙修國)의 사신도 신발을 신지 않았으며, 목이 긴 가죽신인 화(靴)를 신는 풍습을 가진 구자국(龜玆國-쿠샤국) 사신의 경우도 신발을 신었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흔히 이 그림에서 백제 사신과 왜국 사신의 모습을 통해 두 나라의 문화 수준을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좋은 옷과 가죽신을 신은 백제 사신이 왜국 사신보다 훨씬 발전된 나라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발의 경우는 기후 및 풍습의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도 열대 지역 사람들이 신발을 안 신고 사는 경우가 있듯이, 기후가 따뜻한 왜국에서는 사람들이 신발을 잘 신지 않았던 듯하다. 반면 추운 고구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신발을 신고 다녀야 했다. 고구려 온달의 경우,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떨어진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럼에도 해진 신발(弊履)만큼은 신었다고 하니 단지 신발만으로 문화의 수준을 논할 수는 없는 문제인 것이다.

 

 

고려시대의 신발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고려의 신발(履)은 무두질한 가죽(韋)으로 발에 맞추어 만들어 신었고, 묶지 않았다. 가난한 자는 소가죽, 부자들은 사슴 가죽을 사용하였다”고 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말을 타거나 할 때 사용하는 목이 긴 신발보다는 목이 없는 신발을 주로 신었다. 일반 서민들은 가죽신(革履)보다도 초리(草履), 즉 짚신을 많이 신게 되었다. 송나라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는 군인들도 짚신을 신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짚신의 모양은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남다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짚으로 만든 이를 신었다.” 고 하였다. 고려시대 짚신의 확대는 고려가 불교의 영향으로 짐승을 죽이는 것을 권하지 않았고, 가죽의 생산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의 생업에서 수렵의 비중이 크게 줄고, 농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농업의 부산물인 짚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조선시대 다양한 종류의 신발

신발은 성별, 신분, 직업, 복장에 따라 맞는 것이 따로 있고, 재료나 형태에 따라서도 달라지므로 그 종류가 무척 많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종류와 명칭이 더욱 다양해졌다.

 

 

남자 신발

흑피혜(黑皮鞋)

목이 길고 검은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조복(朝服) 및 제복(祭服)에 착용한다.

목화

바닥은 나무이고 목은 천으로 되었으며 검은 천으로 겉을 씌우고

솔기에 홍색 선을두른 것으로, 조복(祭服) 및 공복(公服)에 착용했다.

태사혜

가장자리에 헝겊이나 가죽을 대고 코와 뒤축에 흰 선 무늬를 새긴 신발로

양반들이 평상시에 즐겨 신었다.

짚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널리 신었던 것으로 초리(草履)는 짚신이고 마혜는 미투리이다.

발막신

상류계급 노인들이 주로 신었던 것으로 장식이 적은 가죽신이다.

 

 

여자 신발

당혜(唐鞋)

고무신과 비슷한 형태로, 궁혜(宮鞋), 운혜(雲鞋), 수혜(繡鞋) 모두 비슷한 모양이다.

안쪽은 폭신한 옷감을 쓰며 겉은 여러 색의 화사한 비단으로 만들었고,

바닥에는 징을 군데군데 박았다.

궁혜는 궁중용이고, 당혜는 양가집 부녀자들이 신었으며,

운혜는여염집 부녀자들이 신었다. 수혜는 꽃신이다.

미투리

삼으로 만든 고운 신으로, 대개 서민 이하 부녀자들이 신었다.

 

 

남녀 공용 신발

나막신

나무로 곱게 만든 굽이 있는 신발로, 비올 때 주로 신었다.

진신

비가 와서 땅이 질 때 신던 신발로 유혜(油鞋)라고도 한다.

가죽에 기름을 먹이고 바닥에는 징을 눌러 박아 징신이라고도 불렀다.

남녀를 불문하고 양반 계층에서 주로 신었다.

 

 

특수 신발

투혜(套鞋)

때나 눈 비올 때 추위를 막거나 신을 보호하기 위해 덧신

백혜(白鞋)

초상이 났을 때 누구나 신던 흰색신

노파리

방한용 신으로, 천 사이에 솜을 넣어 만들었다.

습신(襲履)

시체에 신기는 신발로 남자용은 남색, 여성은 연두색이었다.

설피(雪皮)

눈 위에 신는 덧신으로, 미끄러지거나 눈 속으로 발이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다래나무 넝쿨이나 물푸레나무, 노가리 나무 등으로 사용해 만들었다.

 

 

 

전통 신발의 아쉬움

1920년대 고무신이 등장하자, 우리 고유의 신발은 급격히 사라져 갔다. 지금은 운동화, 구두 등에 밀려 장례식에서 상주가 짚신을 신는 정도 외에는 기념품 매장에만 남은 채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다양한 신발을 발전시켜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참고문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백제의 짚신], 2003; 복천박물관, [履, 고대의 신], 2010; 유리우스 립스 저, 황소연 옮김, [가장 인간적인 것들의 역사], 지식경영사, 2004; 박선희, [한국고대복식], 지식산업사, 2002; 임영미, [한국의 복식문화] Ⅰ, Ⅱ, 경춘사, 1996; 브라이언 M 페이건 외 저, 강미경 옮김, [고대세계의 위대한 발명 70], 랜덤하우스, 2007.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