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빛나는 찬란함
1916년 10월 21일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현 평양특별시 락랑구역) 석암리 9호분의 발굴 조사를 마무리하던 과정에서 순금제 허리띠 버클이 출토되었다. 중원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이 화려한 허리띠 버클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평양에서 중국 한(漢) 왕조의 식민지였던 낙랑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낙랑고분에 대한 발굴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대표적인 일제 관학자였던 일본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교수가 발굴을 담당하였는데, 이 금제 허리띠 버클을 발굴하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 유물이 목관 내부의 피장자 허리 부분에 해당되는 지점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피장자가 직접 착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허리띠 버클은 이후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고 수준의 금속공예품 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허리띠 버클은 순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2,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찬란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얇은 금판 위에 수 백 개의 금 알갱이를 일일이 붙여 만든 장인의 솜씨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식이 절로 일게 한다. 가운데 큰 용 1마리가 꿈틀거리고, 그 주위에 6마리의 작은 용이 바짝 붙어 있다. 정확하게 기획된 디자인과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은 솜씨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큰 용의 몸통은 척추를 따라 두 줄의 금실 위에 굵은 금 알갱이를 한 줄로 붙여서 용의 기본적인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작은 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얼굴과 다리, 발톱 등을 표현하는 방식도 일정한 규칙 하에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 포인트는 아름다운 보석, 터키석으로 마무리하였다. 표면에 모두 41개를 박았는데, 지금은 7개만 남아 있다.
세상에 한 점밖에 없을 것 같은 이 정교한 허리띠 버클은 1980년 초 한 점이 더 발견되었다. 그것도 평양에서 수 억 만리 떨어진 이역만리에서 실크로드의 교통로 상에 위치한 중국 신쟝 위구르자치구 카랴샤르 고성에서 등장하였다. 두 유물을 서로 비교해보면, 소재와 형태, 제작기법, 문양 구성 등에서 거의 흡사하다. 그 후 10여점의 유사한 자료들이 추가로 발견되어 학자들의 관심을 더해 주고 있다. 말발굽 모양으로 생긴 허리띠 버클은 금으로 만든 것뿐 아니라 은으로 만든 것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허리띠 버클들은 공통적으로 표면에 동물무늬 장식이 있고, 두드려서 윤곽을 만든 타출기법과 금 알갱이와 금실을 붙인 누금 기법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중원 내지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고, 중원의 변방 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는 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당시 대제국을 형성하였던 한(漢) 황제가 변방의 이민족 우두머리에게 훈장처럼 기념품으로 보내준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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