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승만11

[현대/민주주의발전/제1공화국]하야 후 하와이로 도피하는 이승만 하야 후 하와이로 도피하는 이승만 ★ 이승만(李承晩, 1875 ~ 1965) : 조선·대한제국·일제 강점기의 개화파·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인·교육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일제강점기에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으며,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여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친일 청산 방해, 독재 권력 추구, 6.25 전쟁 중 도주 등으로 많은 오점을 남겼다. 1960년 3.15.. 2021. 7. 17.
[현대/민주주의발전/제1공화국]사사오입 개헌 사사오입 개헌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자 이철승 의원(민주당)이 단상에 올라가 국회부의장 최준수의 멱살을 잡았다. ★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 :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 시절의 집권 세력이었던 자유당이 사사오입(四捨五入, 반올림)을 내세워 당시 정족수 미달이었던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대한민국 헌법 제3호가 제정된 사건. 1954년 5월 20일,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것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발의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재적의원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가결정족수(可決定足數) 136명에서 한 명이 모자란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라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국회부의장 최순.. 2021. 7. 1.
[현대/민주주의발전/제1공화국]발췌 개헌​ 발췌 개헌​ ★ 발췌 개헌​ : 1952년 7월 4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개정. 정부측 안과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李承晩)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등의 사건으로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국회 의원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新羅會) 중심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하고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마련했다. 1952년 7월 4일, 군경(軍警)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여 출석 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 2021. 6. 22.
[현대/민주주의발전/제1공화국]부산 정치 파동 부산 정치 파동 ★ 부산 정치 파동(釜山政治波動,1952년 5월 26일) :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을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한국 전쟁 중에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한 사건. 1950년 5·30 선거에 야당이 압승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1951년 11월 30일,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이를 부결하였다. 정부는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국회의원을 위협하였고, 5월 25일에 국회 해산을 강행하기 위하여 부산을 비롯한 영호남의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5월 26일, 대통령 직선제를 강행하며, 내각제를 주장하는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가 연행하는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 2021. 6. 21.
[현대/광복~정부수립]한국의 친일 청산과 프랑스의 나치 처벌 비교 한국의 친일 청산과 프랑스의 나치 처벌 비교 2021. 6. 14.
[현대/광복~정부수립]김구 암살 사건 김구 암살 사건 ★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 :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白凡 金九)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한 사건. 당시 정부는 안두희가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것을 빌미로 암살 사건을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몰아갔고, 암살범 안두희는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였다.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1990년대부터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시작되었다. 은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군부와 서북청년단이 깊숙이 개입하한 정권 차원의 범죄이며 이승만의 묵인 하에 일어났음이 밝혀졌다. 저작권 문제가 있을 때는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2021. 6. 13.
[현대/광복~정부수립]김구와 이승만 김구와 이승만 (1946년, 창덕궁) ★ 김구(金九, 1876~1949)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대한민국 정치인, 남북통일 활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부위원, 경무국장, 주석 등을 지냈으며, 항일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다. 광복 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임정 법통 운동을 추진하였다.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등(1948) 노력하였으나, 분단을 막지 못했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격에 서거하였다. ★ 이승만(李承晩, 1875 ~ 1965) : 조선·대한제국·일제 강점기의 개화파·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인·교육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일제강점기에 한성정부 집.. 2021. 6. 11.
[현대/광복~정부수립]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1948년 7월 24일) ★ 이승만(李承晩, 1875 ~ 1965) : 조선·대한제국·일제 강점기의 개화파·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인·교육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일제강점기에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으며,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여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친일 청산 방해, 독재 권력 추구, 6.25 전쟁 중 도주 등으로 많은 오점을 남겼다. 19.. 2021. 6. 10.
[현대/광복~정부수립]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신문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신문 ★ 이승만의 정읍 발언(井邑發言) : 모스크바 3상 회의(1945년 12월)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란으로 좌우 세력이 크게 대립하고, 이듬해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한반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승만은 남한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1946년 6월 3일에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이 발언은 민족주의 진영의 큰 반발을 불렀다. 저작권 문제가 있을 때는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2021. 5. 18.
[현대/광복~정부수립]여수·순천 사건 당시 희생된 민간인들 여수·순천 사건 당시 희생된 민간인들 ★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 여순사건(麗順事件)이라고도 부른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국군 제14연대 소속이자 남로당 소속의 김지회·지창수가 주동하여 일어난 군사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이 가담한 사건. 국군, 해군, 경찰에 의해 반란군 2,000여 명이 전멸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반공주의 기치를 강화하였다. 2021. 4. 26.
[현대/광복~정부수립]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 정부 수립 ★ 대한민국 정부 수립 : 한국은 1945년 35년 간의 일본 식민 통치에서 해방이 되었으나, 강대국의 냉전에 휘말렸다. 광복 직후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을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 지배함으로써 민족과 국토가 양분되었고, 3년 동안 점령국인 미·소의 대립과 남과 북의 지도자들 간의 반목과 불화로 통일 정부의 수립이 무산되었고, 남과 북에 별도의 분단 국가가 수립되었다. 분단이 확정되면서 38°선 이남 지역에 국제 연합(UN)의 결의에 의해 1948년 5월 10일 제헌 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동년 5월 31일에 처음으로 개원한 제헌 의회는 7월 17일에 새 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했다. 1948년 8월 15일 새 공화국의 헌법에 근거하여 새 정부의 수.. 2021.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