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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개항~강점기

[스크랩] 731부대 때의 생체실험 사진들

by hwawoon 2013. 10. 28.
731 부대장 : 이시이 시로

 

731 부대 때의 생체실험 사진들 1 

 

 

 

731 부대

731 부대(731 部隊 · 일본어 ·  731部隊     · (ななさんいちぶたい)영어 · Unit 731)는,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 소속의 비밀 생물학전 연구 및 개발 기관으로, 중국

헤이룽장성 (黑龍江省) 하얼빈에 있던 부대이다.

1932년에 설립하였고, 초기에는 ‘ 관동군 방역급수부 · 동향부대 ’ 로

불리다가 향후에는 ‘ 731 부대 ’ 로 개명됐었다.  

중일 전쟁(1937 ~ 1945년)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 · 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했었다.

일본 요원이, 악명 높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었다.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 · 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 이시이 시로 ’ 는 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했었다.

원래는, 태평양전쟁 전 정치 및 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사상 · 

정치적 선전과 일본군의 사상 무장이 임무였었다.

첫 부임자였던, 의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이름을 따라

이시이 부대(石井部隊)라고도 불린다.

 

영미권에서는, Unit 731로 잘 알려져 있다.

731 부대는, 또한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이며, 히로히토의

막내 동생이 그 부대의 장교(고등관)로 복무했었다.

 

 

 

 

전후 처리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때 일본의 생체실험 문제가 언급됐었으나,

관련자들은 실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미국에 제공하고 러시아

넘겨주지 않는 대가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처벌을 막은 것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731 부대가 아닌 일본내에서 소수의 미국인이 생체실험을 당하여 살해됐을 때

그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처벌했었지만, 731 부대를 비롯한 자국민 이외의

사람이 생체실험을 당한 경우에는 전혀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금전까지 지급하며 보호했었다.

 

731 부대의 잔인한 행위는, 현재 전쟁범죄로 공표돼 있는 상태이다.

 

           

                         

 

 

731 부대장 : 이시이 시로

731 부대장 : 이시이 시로와 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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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 없이, 산 채로 복부가 갈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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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 없이, 산 채로피부가 벗겨짐 

세균에 감염돼, 끔찍하게 손상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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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 없이, 산 채로 성기를 떼내려 하고 있음

무서웠어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지요. 그러나 더욱 섬뜩한 것은

당신들이 했던 짓거리를 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끔찍한 것이지요." -겐

 

“731부대로 이송되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매우 중요한 항일 운동가다“

- 김성민 (하얼빈 사회과학원 731연구소 소장)

 

 

 

                               [ 방송내용 ]

 

■. 발굴! 731의 한국인 희생자

 

▶ 항일운동가 심득룡의 행적

 

1911년에 조선에서 태어난 심득룡의 가족은 일제통치에 불만을 품고

연변지역으로 이주한다. 20살이 되던 해 만주사변으로 어머니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고 3년후 동생 심금룡마저 일본 토벌군에 체포되어 사망한다.

 

그 후 심득룡은 1934년부터 만주지역 독립운동부대인 동북인민혁명군에

가입해 소대장 및 청년단장으로서 활동한다. 동북인민혁명군은 만주지역의

대표적 무장독립단체인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이다.

 

심득룡은 소련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서 정보요원으로 활동할

기초를 닦는다. 1940년 중국으로 돌아온 심득룡은 중국 공산당 대련지역

비밀조직의 지도자가 된다. 심득룡은 그곳을 거점으로 동북지역 정보상황을

책임지고 일본군의 정보를 정탐해 무선으로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다리엔 헌병대에 수감된 심득룡이 처음 받은 것은 고문이 아니라 회유였다.

일본군은 심득룡의 이용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득룡은 거절했고, 다리엔 헌병대는 그를 하얼빈의 731부대로

특별 이송한다. 그리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 일본 헌병대 문서; 731부대로 간 한국인 4명의 신원확인

 

김성민 소장이 발굴한 조선인 관련 문서,

여기에는 한성진, 김성서, 고창률, 이기수란 인물에 대해서 본적, 출생지,

암호명, 활동범위, 활동노선, 체포된 일시 및 장소, 731부대로

이송된 시간 등이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한성진(韓成鎭) - 함경북도 경성 출신, 훈춘현 춘화촌 뚜황즈마을 2통

김성서(金聖瑞) - 함경북도 길주면 출신, 훈춘현 젼안촌 마띠다 8통

고창률(高昌律) -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출신, 훈춘 다통구 9통

이기수(李基洙) - 함경북도 신흥군 동면 출신, 훈춘현 춘화촌 타이마거우에서 체포

 

▶ 훈춘으로 가다 ; 신원이 밝혀진 4명의 행적 추적.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 3국의 경계가 접하는

국경도시 훈춘. 신원이 밝혀진 4명은 모두이곳 훈춘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이다.

 

훈춘에는 지금도 고창률의 주소지인 다통구라는 지명이 있다.

하지만 훈춘 도심 재개발로 다통구는 현대식 대형 상가 건물로 변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도 벌써 오래 전에 각지로 흩어졌다.

또 다른 한국인 희생자로 밝혀진 한성진의 주소지로 되어있는 뚜황즈.

 

훈춘에 속하기는 하지만 시내에서 자동차로 5시간을 가야하는 오지에 있다.

조선족이 300호 넘게 살았던 마을의 항일투쟁이 거세지자 일본이

전체 마을에 탄압을 가했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김성서의 주소지는 젼안촌 마띠다. 수소문 끝에 찾은 김백룡 옹(82) 김성서가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이고 잡혀간 이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 생체실험 뿐이었나? - 731부대의 만행

 

▶ 731부대의 만행 ; 중국내 세균실험과 독가스탄의 폐해

 

영하 60도에서의 동상 실험. 사람과 말의 '피 교환 주사' -

비행기 이용해 페스트 감염된 벼룩 살포 -

아이들에게 탄저균 사탕을 나눠주고 효과 확인을 위해 산채로 배 가르고 -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그들에게 인간은 실습용 ‘재료’ 불과했다.

 

인류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사의 한 장을 기록한 731부대의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퇴각 직전, 일본군들은 중국 내에 다량의 독가스탄을 파묻었고,

2백만개의 독가스탄이 속속 발굴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 한국인 희생자가 남긴 과제

 

패전 후 731부대는 모든 시설을 파괴했다. 생체실험 대기자 400여명을

모두 죽이고 소각했다. 이는 8월 9일 아침부터 3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들은 이를 ‘청소’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일본으로 돌아온 731부대원들 누구도 ‘청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핵심 간부들은 주요 직책을 맡아 일본 의료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731부대원들의 죄를 면책해준 댓가로 미국은 생체실험 표본과 자료들을

완벽하게 확보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들을 망각 속에 남겨둘 것인가.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은 일제에 대항해 싸우며

조국을 구하려 했던 독립투사들이었다. 아직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한국인 희생자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의 삶의 궤적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과제다.

 

 

 

 

 

                           [ 731부대 ]

 

■ 창설배경

 

일본 군부는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기획에있어서 적과의 전쟁에 되도록 적은

물자와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만 중국대륙의 완전점령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결론의 산물이 바로 세균전이었다

.

■ 정 의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첫 부임자였던 의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이름을 따라, 이시이 부대(石井部隊)

라고도 불린다. .

 

731 부대는 또한 히로히토 천황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이며,

일왕의 막내 동생이 그 부대의 장교로 복무하였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에 있던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이다

 

731부대는 일제가 세운 생물학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516부대(치치하얼 시, 齊齊哈爾), 543부대(하이라얼 시, 海拉尔),

773부대(Songo), 100부대(창춘, 長春), 1644부대(난징, 南京),

1855부대(베이징, 北京), 8604부대(광조우, 廣州), 200부대(만주),

9420부대(싱가폴) 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기관도 731부대와 유사하거나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헌병대가 관리하였다.

 

731부대와 관련된 많은 과학자가 나중에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그들이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731 부대의 활동은

국제연합에 의해 전쟁범죄로 선포되었다.

 

 

■ 희생자들

 

731 부대의 희생자들중국, 한국, 몽고, 러시아의 군인과 시민,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병기의 실험 재료로서 살해되었다.

 

거기에는 일부 미국인과 유럽인도 포함되었다.

731부대에서 개발된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

 

 

                      [ 731 부대의 만행 ]

 

■ 생체 실험 (또는 생체 해부)

 

수용자는 마취없이 생체 실험을 당하였다.

다양한 질병에 걸린 수용자를 생체 해부하였다.

과학자들은 수용자에 대한 침습적 수술을 하였다.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모두 살아있는 상태에서 시행했다. 왜냐하면 부패 과정은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성인 남자, 성인 여자, 어린이, 영아 모두 대상이었다.

 

생체 실험은 임산부에게도 시행되었다. 어떤 때는 의사에 의해 수태되고

그 태아는 꺼내졌다.

출혈의 연구를 위해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였다.

절단된 팔이나 다리는 가끔 수용자의 반대편에 다시 붙여졌다.

몇몇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는 얼려져 절단되었다.

어떤 때는 얼렸다가 녹여서 치료받지 않은 괴저 및 부패의 영향을 연구했다.

일부 수용자의 위는 외과적으로 절제되고 식도와 장을 연결하였다.

일부 수용자에게서 뇌, 폐, 간의 일부가 제거되었다.

 

■ 무기시험

 

수류탄을 시험하기 위해 인간 목표물을 다양한 거리의 다른 위치에 세웠다.

인간을 대상으로 화염방사기를 시험하였다.

인간을 말뚝에 묶어 세균방출폭탄, 화학무기, 폭발성 폭탄을 시험하였다.

 

■ 세균전 공격

 

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접종되어 그 효과를 연구했다.

예방접종이라고 위장하였다.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강간에 의해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

 

질병 전파 벼룩을 대량으로 얻기 위하여 수용자에게 벼룩을 감염시키고

세균전의 유용성을 연구하였다.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페스트, 콜레라, 탄저병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 기타 여러 실험

 

일부 수용자는 숨막혀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하여 목매달렸다.

 

일부 수용자는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동맥에 공기가 주입되었다.

 

일부 수용자는 신장에 말의 소변이 주입되었다.

 

일부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물과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일부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고압의 방에 놓여졌다.

 

일부 수용자는 극저의 온도에 놓이어 동상이 걸리게 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인체 살의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일부 실험은 온도와 화상, 인간 생존의 관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수용자는 원심분리기에 넣어져 죽을 때까지 돌려졌다.

 

동물의 혈액이 일부 수용자에게 주입되어 그 효과가 연구되었다.

 

일부 수용자를 가스실에 넣어 다양한 종류의 화학 무기를 시험했다.

 

바닷물이 몇몇 수용자에게 주사되었다. 바닷물이 생리식염수를

대치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 구체적인 사례

 

소총을 다룰 줄 아는 능력으로 선별된 의무병과 일본적십자 간호원들이

일반 시민들의 수족을 절단하는 만행을 도왔다. 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무감각으로 일관한 것이었다.

 

어떤 의사들은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내던지려고 할 때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주사기로 그들의 심장에 공기를 주입했다.

 

실험 대상자들이 공포에 대해 무감각해지도록 부채질한 것은 731부대의

공포통치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끊임없는

비애만 있었을 뿐이었다. 개별적인 살해에서 대량 학살에 이르기까지

731부대는 다양한 실험을 했다.

 

그들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페스트에 감염된 쥐들을 고공 폭탄처럼 방출했다..

 

42 가구에서 43 명의 사람이 죽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각기 흩어져,

필사적으로 이 전염병을 막으려했다.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은 <내 여동생의 죽음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여겨집니다.

동생은 혼자서 작은 오두막에 있었지요. 그 애를 돌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동생을 보러 갔지요. 목이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어요. 그리고 눈을 뜬 채 죽어 있었어요.>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콜레라, 탄저병, 그리고 여러 병원균이 공급되는 식수와 음식에 넣어져

제공되었어요. 어떤 경우에는 콜레라 균이 묻어 있는 사탕을 한 지방 행사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 세균무기의 사용 ]

 

페스트균을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石井四郞은 쥐를 대량으로 잡고 양식하게

하는 한편 동물사육반을 설치하였다. 이에 필수적인 대규모 황서사육실과

쥐사육실을 건설  하였다.

 

모든설비를 가동하면 페스트균을 '매달' 300Kg, 혹은 콜레라균 700Kg을

생산할 수 있었다.

 

1940년 10월 27일. 731부대와 남경 1644 세균전부대가 협력하여 닝뽀지구에

페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적어도 106명이 페스트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

 

1941년 5월 제4부 제1과 대위의 명령으로 제4부의 위해 탄저균. 페스트균을

수백kg 제조 하였고 1942년 7~9월에 상한 콜레라균을 약 70Kg을 제조하여

항공편으로 남경1644부대로 보내 중국군민을 살해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150개 석유통에 벼룩을 번식시켜 배양한 900cc벼룩과 200마리

쥐를 동시에 상덕지구로 보내 중국군민을 살해하였다고도 한다.

 

 

1942년 8월 원정대원들은 이취봉의 병균에 감염된 며느리를 마을밖으로

강제로 끌고가서 그 자리에서 복부를 해부하고 내장을 꺼내 세균전염효과를

검사하였다.

 

731부대는 전쟁에서 처음으로 세균무기를 사용하면서 준비부족과 경험부족으로

자체 1개사단의 병력이 세균감염당한 사례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石井四郞은 세균무기 사용에 공이 있어 표창를 받았다.

 

그후 731부대의 대부분처럼 이시이도 생물학자로서의 명예를

계속 유지했고,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출처 : 광복회 카페
글쓴이 : 우리는 한마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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