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1700년대 후반 청나라에 간 조선사신단의 일원이 북경의 천주교와 접촉하여 자생적인 천주교인이 생기기 시작하자 1801년, 1839년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9년에는 천주교 신자가 약 1만 7000명으로 불어났다.
1863년 어린 고종의 왕위에 오르면서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1866년 러시아 선박이 동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의 조정에 관직을 갖고 있던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의 자유를 신장시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베르뇌 주교에게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프랑스와 조선이 동맹을 맺는 협상을 추진하도록 촉구했다. 대원군은 천주교 ‘수괴’들을 은신처에서 끌어낼 계략으로 짐짓 이 안에 호감을 표했다. 1866년 2월 베르뉘 신부가 서울에 오자 그를 체포하고, 또 다른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에 대해서도 체포령을 내렸다.
베르뉘 주교는 1866년 3월 7일 참수되었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정책은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과 약 1만 명에 이르는 천주교인을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처형을 모면한 3명 중 한 명인 리델(Felix-Claire Ridel) 신부가 낚시배를 타고 중국 천진으로 탈출하였다. 이때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 기지를 두고 있던 프랑스 극동전대 피엘 구스탑 로즈(Pierre-Gustave Roze, 魯勢)제독이 천진에 와 있었다. 리델 신부로부터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 신자 학살소식을 들은 로즈 제독은 조선에 대한 보복 원정을 결심했다. 북경주재 프랑스 영사 대리 헨리 디 벨로네(Bellonett, H.D., 伯洛)가 강력히 후원했다.
로즈는 본격 원정에 앞서 그해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군함 3척을 이끌고 서울 양화진 서강까지 와서 강화도와 서울로 진입하는 한강 수로탐사를 한다며 무력시위를 겸한 정탐을 하고 돌아갔다. 예비원정 결과 큰 배와 제한된 병력으로 요새화된 서울을 공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강화도를 점령하기로 했다. 그는 추수기에 서울로 통하는 수로의 입구를 봉쇄하면 조선조정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 문화잡지 글마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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