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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삼국·남북국

[스크랩] 3세기말 고구려 신성(新城)에서 무슨일이?

by hwawoon 2013. 9. 10.

 

< 3세기말 고구려 신성(新城)에서 무슨일이? >


모용외의 부친인 모용섭귀는 위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시에 유성(柳城)을 보전한 공이 있었으나, 전쟁후 위나라로부터 참밥 대접을 받았다. 그후 (서기 265년)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晋)나라가 들어섰다. 진나라는 (서기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킬때까지 북방에 대한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진나라는 (서기 276년) 유주에 속했던 창려, 요동, 현도, 대방, 낙랑군 등 5개 군국을 분리해 평주(平州)를 설치하고 평주자사 동이교위로 하여금 동이지역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런 혼란기를 틈타 모용섭귀는 (서기 281년) 평주의 창려군을 공격하여,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한다.

(서기 283년) 모용섭귀가 죽고, 동생인 모용내가 권좌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서기 285년)에 모용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모용내를 죽이고, 모용외를 추대한다. 모용외는 그해 우문선비에 공격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진나라에 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모용섭귀가 창려군을 공격한 시기부터 이미 평주에 대한 공격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모용외는 평주 여러 군(郡)을 공격하면서 유주 요서군까지 이르렀다.


이에 진 무제는 유주의 제군을 보내 비여(肥如)에서 모용외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당시 평주 동이교위는 선우영이었다. 유주 군대에 크게 패한 모용외는 군사의 수를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동쪽의 위구태부여를 공격하여 국성(國城)을 평정하고 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이에 진 무제는 위구태부여를 구원하라는 소(詔)를 발하지만 동이교위인 선우영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파면하고 하감(何龕)을 동이교위로 삼았다. 위구태부여를 멸망시킨 모용외는 동이교위에게 사자를 보내 우문과 단선비를 아우르는 북방의 패자임을 인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동이교위 하감과 모용외간에 화친이 이루어졌다. (서기 289년) 모용외는 도하(徒河)의 청산으로 옮겼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서기 270년) 중천왕의 둘째 아들인 약로가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서천왕이다. 앞서 중천왕은 (서기 259년) 위나라의 선비족 출신 장수인 위지해를 양맥 골짜기에서 대파 하였다. 양맥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관구검의 침입 이전의 영토를 회복한 것으로 생각 하여야 한다. 따라서 중천왕 시기는 서부 지역에 대한 중요성이 그 어느때보다 높았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천왕은 서부 대사자 우수(于漱)의 딸을 왕후로 삼는다. 서천왕은 즉위 이듬해에 비류부 출신 국상인 음우(陰友)가 죽자 그 아들인 상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고구려 본기>

(서기 276년) 여름 4월에 왕은 신성(新城)<혹은 신성은 나라 동북쪽의 큰 진[大鎭]이라고도 하였다.>으로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에 왕은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9월에 신비로운 새[神雀]가 궁정에 모여들었다.


서천왕은 서부 출신인 왕후를 맞이하여 이 지역을 안정화 시키고, 비류부 출신 국상인 상루의 조언으로 위나라의 침입후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멀어졌던 읍루(숙신)족들에 대한 공격을 단행 하기위해 신성(新城)으로 행차한다. 이때 신성이란 하나의 성을 의미 할수도 있으나, 삼국사기 기록처럼 전략상의 요지에 설치했던 군진(軍鎭), 즉 대진(大鎭)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신성의 축조는 고국원왕 시기인 (서기 335년)이었다. “봄 정월에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라는 기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서천왕이 신성에서 돌아온 이후 숙신에 대한 공격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정황상 숙신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는 생각 할 수 없다.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국지적인 군사 조치는 있었을 것이다. 본기에 “9월에 신비로운 새(神雀)가 궁정에 모여들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추모왕 시기인 (기원전 32년)에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라는 기사 뒤에 행인국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군사적 조치에 분노한 숙신은 (서기 280년)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변경의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서천왕은 신하들이 추천한 자신의 동생인 달가(達賈)를 보내 적을 치게 하였다. 달가는 기이한 꾀를 내어 엄습해서 단로성(檀盧城)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00여 가(家)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부락 예닐곱 곳을 항복시켜 복속시키는 전과를 얻었다. 이에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대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 이후 신성 지역은 북부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서기 292년) 서천왕이 붕어하고 태자인 상부(相夫)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봉상왕이다.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던 봉상왕은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안국군 달가를 죽인다. 그리고 신성이라는 특수지역에 고노자(高奴子)를 임명하여 행정과 군사의 일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이때 봉상왕의 아우인 돌고(咄固)는 안국군 달가의 죽음을 보면서, 봉상왕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된다. 돌고는 발기가 신대왕을 몰아내기 위해 공손도군을 끌어들인 것처럼, 모용외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고구려 본기>

(서기 293년) 가을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여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는 왕이 도망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 재(新城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갔다.


(서기 293년) 8월에 모용외는 봉상왕이 양맥 근처로 행차한 틈을 이용하여 기습적으로 공격 하였다. 이에 봉상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봉상왕이 신성으로 도망가자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였다고 한다. 모용외가 고구려 깊숙이 추격할 정도였다면, 다분히 봉상왕을 목표로 했음을 알수가 있다. 이때 신성 재(新城宰)인 고노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모용외의 군대를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패하고 물러갔다.

8월에 벌어진 모용외의 기습작전은 봉상왕의 아우인 돌고와 관련이 깊다. 그해 9월에 봉상왕은 돌고를 자살시켰으며, 그 아들 을불(乙弗)은 들판으로 달아났다는 것을 볼때 돌고와 모용외간에 어떠한 음모가 있지 않았나 싶다. 봉상왕의 목숨을 구한 소형(小兄)의 관등을 가진 고노자는 대형(大兄)으로 승차 하였고,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받았다. 봉상왕 제거 작전에 실패한 모용외는 이듬해에 대극성(大棘城)으로 옮겨와 살았다. 봉상왕은 국상 상루가 죽자 남부의 창조리(倉助利)를 국상으로 임명하였다.


(서기 296년) 모용외는 재차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故國原)까지 이르렀으나, 창조리와 고노자에 의해 물러갔다. 봉상왕은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는데, 이후로 모용외는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 국상 창조리와 신성태수 고노자에 의해 나라가 안정되자, 봉상왕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곤핍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궁실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증축하였다. (서기 300년)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봉상왕은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인 자들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봉상왕에게 토목공사를 중단하고 사직과 백성을 생각 할 것을 간하였다. 그러나 봉상왕은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다.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라고 하면서 따르지 않았다. 창조리는 장차 봉상왕을 폐하려고 먼저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 등을 보내 을불을 찾게 하였다. 이들은 비류하 가에서 을불을 찾아 모시고 돌아왔다. 9월에 봉상왕이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나갔을때, 창조리와 대신들은 왕을 사로잡아 별실에 가두었다.


봉상왕은 별실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며, 두 아들도 따라서 죽었다. 을불의 아버지인 돌고가 봉상왕을 제거 할려다가 죽었고, 달아난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끊내 죽이지 못한 것이 봉상왕이 죽게된 원인이었다. 을불이 없었다면 신하들이 반란을 획책하지 못했을 것이다. 봉상왕의 목숨을 구했던 고노자의 행보는 기록에 없다. 고노자가 봉상왕으로부터 관직과 식읍을 하사 받았으나, 미천왕을 추대한 창조리와는 막연한 사이였다. 따라서 창조리의 반란때, 고노자가 축출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고노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고노자(高奴子)는 (서기 319년) 모용외의 장수인 장통에게 사로잡힌 여노(如孥)와 같은 인물이다. 그 이유는 고노자(高奴子)라는 성명에서 고(高)씨가 아닐 것을 전제로 노자(奴子)를 합치면, 여노(如孥)라는 이름에서 노(孥)자가 된다. 따라서 고노자는 원래 여노인데 후세 사관들이 잘못 기술하여 고구려 고씨를 집어 넣어 고노자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동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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