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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선사·고조선

[스크랩] 준왕이 도착한 금마저(金馬渚)는 장산군도의 대왕가도(마한도)

by hwawoon 2013. 7. 16.

준왕이 도착한 금마저(金馬渚)는 장산군도의 대왕가도(마한도)

사진설명: 요동반도의 남쪽에 펼쳐진 금주와 대련지방을 신금(新金)으로 표시한 위성지도다. 그런데 이곳이 백제시대의 금주 금마군 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만주원류고》를 인용한 《흠정사고전서》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만주원류고는 그 출전을 송나라때 기록인 《통고(通考)》에서 참고하였다고 하고 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로 변한 대련과 장산군도 사이에 금석탄(金石灘)이란 해변 관광지가 있고 이곳의 주변을 신금)新金) 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도에서 신금의 좌측으로 보이는 풍산산성은 과거의 외패산성으로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 44년 낙랑군의 동부도위 산하에 있던 영동7현을 수복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와 빼앗은 성이라는 기록도 《금사》열전의 주석을 통해서 밝혀졌다. 그러나 주석에는 벽류하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풍산산성은 벽류하의 원류에서 분수되어 서남쪽으로 흐르는 지류가 있다. 

 

<일본육군참모국제작(1894)조선팔도전도> 동고려성과 서고려성의 위치는 요동반도의 남부 중심지역이다.그렇다면 《세종실록》에서 길이가 수천리에 달한다는 고려장성이 이곳이 아닐까.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을 긍정적으로 연구하지않고 한사코 부정하기에 바쁜 심사는 무엇인가.

 

동고려성 남쪽으로 분포된 왕가도는 대왕가도와 소왕가도로 나뉜다.현재의 이름은 석성도다.이지도에서 보이는 동고려성의 동쪽으로 봉황성이 있고,봉황성은 고려가 동경으로 불렀다.동고려와 서고려가 왜 요동반도의 중간을 갈라 구분되었을까.통설에는 동고려.서고려는 없다.오직 서경만 있을뿐.《금사》는 대왕가도를 마한도(석성도)라고 하였다.

 

宋:通考高麗以百濟爲金州金馬郡號南京

 

위의 기록에서 송나라의 통고에, 고려는 백제의 금주 금마군을 남경으로 불렀다고 하고, 주를 달았는데, <그땅 백제의 동남 변경의 전부를 신라가 점유하였다가 후에 발해와 거란으로 귀속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백제의 동남 변경이 전북 익산이 될수없다는 결론이고 백제의 영토는 대련의 서북쪽으로도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다.

 

 

다음글은 장산군도가 살수의 남쪽에 위치한 삼한의 발흥지었다는 근거가 될것으로 확신하고 인용한다. 다같이 검토하시기 바란다. 지금까지도 전라북도의 익산 땅이 금마 마한 땅 이라고 믿고 연구 서적들을 량산하고 계시는 학자님들께서는 심각한 검토가 있기를 바란다.만약에 전북의 익산이 준왕이 머물렀던 마한의 치도었다면 삼한을 다스리던 중심지가 되어야 하는데 현제의 금마땅에서는 백제 후기의 무왕시대 유적만이 일부 발굴되고 있다.

 

***《금사》에는 마한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요동반도 서남부(蘇復州)의 반란을 토평하는데 반란군이 도망간 곳이 동남부로서 지금 장해현의 <마한도>였다. 그 옆에 왕가도(王家島)로서 추적이 되었으니 현재 마한도(馬韓島)의 이름은 석성도(石城島)라고 한다.

/新校本金史/列傳/卷八十 列傳第十八/斜卯阿里
- 1799 -
  蘇、復州叛,?至十萬.旁近女直皆保於太尉胡沙家,築壘?固.敵圍之數重,守者糧芻俱盡,牛馬相食其?尾,人易子而食.夜,?二人出,告急於阿里.阿里赴之,內外合擊之,破其?於闢?密罕水上,?殺幾盡,水?之不流.蒲?古胡什吉水、馬韓島凡十餘戰,破數十萬?.契丹、奚人聚舟千?,將入于海.阿里以二十七舟邀之,中流矢,臥舟中,中夜始蘇.敵船已入王家島,?夜取海路追及之,敵走險以拒,阿里以騎兵邀擊,再中流矢,力戰不退,竟破之,盡獲其舟.於是,蘇、復州、婆速路皆平.

◆ 소,복주(蘇、復州) 소주와 복주(현재 같은 지명),


◆ 蒲?古胡什吉水 (벽류하, 고대 비류하. 온조 형 비류태자가 갔던 장소로 추정되는곳이다. 벽류하에 있는 <위패산성>은 후한 광무제의 군대가 쳐들어온 곳이고, 비류는 쫓겨나서 온조가 먼저 있던 대방고지인 광록도로 합류하였다.
◆ 마한도(馬韓島); 현재 이름은 석성도(石城島)
◆ 왕가도王家島; 현재 이름도 왕가도 

 

*** 금마군에 대해서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 18권 해내경에는 조선을 말하며 준이 위만에 쫓겨나 간곳이

근거없는 한반도가 아니라 명확히 한나라 즉 대륙동해안의 금마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漢地金馬郡)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산해경 광주》가 사고전서안에 수록되어 있다.

 

근래에 출간된 윤명수님의 《금사》에는 열전 제18 이 빠져있다. 따라서 열전에 대한 주석도 빠져있다. 뿐만아니라 인터넷으로 지원되는 중국싸이트에서는 《金史》열전의 원문은 확인할수 있으나 열전의 주석은 모조리 탈락되어 있다.

 

청주한씨 족보의 마한의 왕통에 따르면 준왕(후조선의 哀王=마한의 武康王)은 BC194년에 마한으로 이도하고 그해에 돌아가셨는데 후대가 평양으로 들어가 도읍을 세우고 마한왕 8세를 이었다고 하였다.그렇다면 평양으로 들어가 도읍을 세웠다는 대목은 준왕이 위만의 평양으로 부터 탈출하여 바다로 도망한 후에 마한에 도착하여 한왕을 선언하고 서거하자 후대가 한반도의 새로운 평양에 들어가 도읍을 세웠다고 한것이다.

 

당시 새로운 평양성을 구축한 기록은 《한단고기》의 <북부여기>에서 볼 수 있다.그후 마한왕으로서 8대를 지내는 동안 다른곳으로 도읍을 옮긴 사실이 없다.그렇다면 그들이 바다로 도망하여 처음 도착한곳이 마한의 금마저였지 익산의 금마가 아니었다.마한의 금마저란 요동반도의 남쪽바다에 펼쳐진 장산군도중의 대왕가도를 말한다.따라서 한서(韓西)란 대왕가도의 서쪽에 있던 위만조선 즉 사문도(장도)를 말한것이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구산(九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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