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도서관/고려

[스크랩] 여몽전쟁시 몽골군과 고려군의 전투력

by hwawoon 2013. 3. 29.

 

 

 

여몽전쟁시 몽골군과 고려군의 전투력

 

 

여몽전쟁 당시 몽골군과 고려군의 주요 무기는 활, , 창이었다. 이들은 성을 탈환하거나 지키기 위해 다양한 전쟁 장비를 사용했다. 몽골군은 여러 나라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신무기 제조기술을 확보한 상태였다. 고려군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이후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인지했으며, 이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발달로 이어진다.

 

몽골군의 무기와 전술

 

주로 활, , 창을 사용했다. 화살은 관통력이 매우 뛰어나고 300m까지 날아갔다. 중기병은 칼과 창, 방패를 소지했다. 이들 무기로 기수를 찍어 말에서 떨어뜨렸다. 성곽을 공격할 수 있는 장비도 갖고 있었다. 금나라와 요나라를 정벌하면서 철과 신무기 제조기술을 확보했다. 수전에는 취약했지만 공병기술은 갖고 있었다. 성에 오르기 위한 이동식 고가 사다리, 투석기, 성벽과 같은 높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장비, 고려군의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뚜껑이 달린 수레 등을 보유했다.

 

 

 

기병으로 기습 공격을 한 뒤 중기병과 함께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 밤낮 없이 성격을 공격했으며, 소부대는 군량 확보를 위해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식량 등을 약탈했다. 유럽의 영향을 받아 휘어진 칼을 사용했다. 창은 길이가 다양했는데, 단창은 멀리 잇는 적을 향해 던지고, 장창은 가까이 접근한 적을 죽이는데 썼다. 병력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기동성을 활용해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는 전술은 대단했다.

 

몽골군의 전투력

 

13세기 고려를 향한 환난의 기운은 아시아와 유럽에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에서 당시 세계에서 몽골이 떨쳤던 영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무기를 내려놓고 타타르(몽골)군주의 지배를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의 군대가 모두 전멸하리라.

 

당시 몽골은 이 같은 최후통첩 하나만으로 국가를 정복한 사례가 있다. 저항한 나라를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몽골군의 잔혹성에 세계가 얼마만큼 공포에 떨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몽골군의 장수인 수부타이가 이끄는 군대는 아시아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고, 1237(고려 고종24)1221일 러시아 침략을 시작으로 유럽 침공의 막을 올렸다. 몽골군은 그 이후 키예프(현 우크라이나)나 블라디미르(현 러시아주) 동 슬라브 공국에 공격을 가했다. 2141411일 벌어진 모히 전투 등을 통해 헝가리 왕국을 격파하고, 래그니차 전투를 시작으로 폴란드 남서부까지 정벌했다. 이에 따라 유럽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헝가리, 폴란드뿐만 아니라 인근의 키에반러스 지역까지 몽골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몽골군이 적은 수로 이런 막강한 전투력을 가졌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칭기스칸과 쿠빌라이칸 시대를 서술한 여러 역사 서적 등에 따르면 몽골군은 다국적으로 이뤄진 조직이었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몽골군은 정벌한 지역의 사람들을 군에 편입해 이들이 제공하는 군사정보를 기반으로 다른 나라의 지형지물이나 상황 등을 잘 알 수 있었다. 몽골군은 심지어 기독교를 믿어, 몰골을 미개민족으로 바라보는 유럽인까지 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또한 몽골은 정벌한 나라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다. 정벌국에 통치권을 그대로 남겨두고 조공만 받는 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덕분에 적은 인구를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세계의 넓은 땅을 호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서유럽까지 진출하지 못했다. 세계의 역사학자들은 이점에 대해 몇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헝가리계 알타이학 연구자인 데니스사이노어는[ 서양의 몽골, 아시아 역사 저술] 이라는 책에서 기후를 꼽는다. “ 모하이 강에서 더 이상 몽골이 진격하지 않은 것은 독일 공국들의 많은 인구와 습한 날씨로 인해 활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감이 한 원인이 된 것이며, 또한 몽골군은 숲과 성이 많은 서유럽의 환경과 견고히 무장한 유럽의 기병에 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고려군의 무기와 전술

 

고려군은 활과 칼로 맞섰다. 칼은 몽골군의 것처럼 곡선형이 아니라 일직선 형태였다. 들판의 곡식을 불태워 없애거나 갖고 성에 들어가 저항하는 전술을 섰다. 아군의 군량을 확보하는 동시에 몽골군에 군량을 넘겨주지 않기 위함이다. 몽골군이 고려에 계속 주둔하지 않고 여러 차례 나눠 고려를 침략한 이유에는 군량 확보 문제가 있다. 또한 고려군은 청야한 뒤 섬으로 들어가는 해도입보 정책도 자주 썼고 성을 지키기 위해 대우포와 투석기 형태의 포차 등도 사용했다. 몽골의 첨단 무기인 뚜껑 달린 수레는 쇳물을 부어 불태웠다.

 

고려군이 성곽 방어전술만 썼던 것은 아니다. 몽골군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 성 밖으로 나와 몽골군을 급습하기도 했다. 해전에서도 선박에 대포를 달아 공격하기도 했다. 몽골군은 수군 70척으로 압해를 치려다가 압해 사람들이 큰 배에 대포 2대를 장착하고 버티자 대포에 맞아 가루가 될 것을 걱정해 공격을 포기하기도 했다.

 

고려군의 전투력

 

아시아권은 물론 유럽까지 복속시키면서 유례없는 세계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군에 맞서 싸운 고려군의 전투력은 어떠했을까. 기록을 보면 일방적으로 밀린 것은 아니었다. 고려군의 전력이 오히려 몽골군보다 우세했던 경우도 많았다. 고려군이 몽골에 패한 것은 왕족과 정권을 잡고 있던 군부의 무능. 부패로 인한 민심이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군은 몽골군의 포격에 맞포격으로 대응했고, 성을 넘기 위해 만든 사다리에는 큰 날이 달린 대우포라는 신무기로 대응했다. [ 고려사절요]고종18(1231) 12월 기사에는 몽골군이 큰 포차를 가지고 귀주를 공격하므로, 박서가 또한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수없이 쳐 죽이니 몽골군이 물러났다,...몽고 군사가 운제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려 하므로, 서가 대우포로써 맞아 치니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어서 사닥다리를 가까이 댈 수가 없었다. 대우포란 것은 큰 날이 달린 큰 무기였다고 나온다.

 

고려군은 성을 지키는 싸움에서 뿐만 아니라 백병전에서도 탁월했다고 한다. 고려의 별초군은 300명으로 몽골군1천 명을 제압하는 전과(12564월 의주 전투)를 거두기도 했으며, 역시 같은 때 대부도 별초는 야간에 인천 소래산 밑에서 몽골병 100여 명을 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듬해엔 몽골병이 창린도(옹진반도 앞의 섬)를 침공하자 웅진 현령 이수송이 별초를 거느리고 쳐서 물리쳤다고도 한다.

 

정예군으로만 치면 고려군 전력이 세계 최강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패했다. 전쟁은 정예군으로만 치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몽전쟁은 여실히 보여준다.

 

 

출처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글쓴이 : 德光人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