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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고려

[스크랩] 기 황후(奇皇后)와 공민왕이 고려의 정통성을 회복 하였을까?

by hwawoon 2013. 4. 29.

<기 황후(奇皇后)와 공민왕이 고려의 정통성을 회복 하였을까?>


기황후는 고려사람 기자오의 딸로서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졌었다. (서기 1340년) 고려인으로 원나라의 황후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황후에 대해 몹시 궁금해진다.


먼저 기황후의 가계에 대해 알아본다. 기록에는 없지만 기황후의 아버지는 기자오이며, 기자오의 할아버지는 (서기 1232년) 대장군이었던 기윤숙이었다. 기윤숙은 (서기 1257년) 벼슬이 문화시랑 평장사로 이해에 죽었다. 기윤숙은 성품이 사치하고 호협하여 권문(權門)에 붙어서 중서성ㆍ문하성의 벼슬을 두루 지냈다. 항상 벽제를 하면서 창기의 집에 왕래하니, 길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웃었다라고 기록되어 평판이 그리 좋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기윤숙 사후 손자인 기자오까지 문헌기록에 그들의 정보가 없다. 다만 (서기 1269년)에 대장군 기온은 원종의 서매부로서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그 사무를 맡았는데, 김준의 집 재산을 적몰하여 그 보화를 김경과 최은에게 뇌물로 주었으므로 임연이 모두 미워하여 섬에 귀양보냈다고 하였다. (서기 1278년)에는 기홍석이 밀직부사로 나오고, (서기 1287년)에 대장군 기관, (서기 1291년)에 추관정(秋官正) 기효진이 기록에 있다. 이들중에 기자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수가 없으나, 부인은 정3품의 벼슬을 지낸 이행검의 딸이다. 기자오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훈이나 음덕에 의하여 특별한 대우를 받아 관직을 얻었는데, 음보(蔭補)로 정8품 무관직 산원이 되었다.


이행검은 (서기 1279년) 정랑 임정기와 봉의랑 고밀의 임명장에 동의하는 서명을 거부하다 유배되었으나, 매부인 이존비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 후 보문각직학사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강직한 성품으로 집안은 가난하였다. 이런 이유로 무관직인 기자오가 이행검의 사위가 될수 있었지 않나 싶다.

(서기 1331년) 원나라에서 환관 홍대불화(洪大不花)를 보내어 처녀를 구하니, 중앙과 지방이 소란하였다고 한다. 이때 기자오의 딸인 기황후가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졌을 것이다. 이해에 기황후의 남편이 되었던 타환첩목이 태자가 고려에서 유배 생활을 마치고 환국하였다. 원나라는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가 세조에게 환관을 바친 뒤부터 공물로 환관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들 환관중에 고용보가 있었다. 고용보는 타환첩목이 태자가 원나라로 환국하자 자신의 영달을 위해 끌려온 공녀중에 기황후를 태자의 궁녀로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서기 1332년) 권신 엔터무르에 의해 옹립된 친아우인 영종(寧宗)이 재위 43일만에 죽자, 타환첩목이 제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순제이다.


고용보는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했다. 순제가 기황후를 총애 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순제가 원나라 왕실간의 정쟁으로 인해 고려의 대청도로 귀양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 여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각인 되었던 것이다. 둘째는 기황후의 총명함과 아름다운 외모이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에는 “그는 영특한 성품과 살구 같은 얼굴, 복숭아 같은 뺨, 버들 같은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순제는 기황후에 흠뻑 빠져 있었다. 더욱이 후비열전에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순제의 총애는 답납실리 황후의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답납실리는 기황후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순제의 제1황후 답납실리는 순제와 정적 관계이던 태평왕 연철목아의 딸로 순제와의 사이도 무척 좋지 않았다. 이에 순제는 (서기 1335년) 승상 백안과 손잡고 황후 답납실리의 형제들을 황제 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하였고, 그리고 답납실리는 독살 당하였다.


기황후가 아무리 총명했다고 해도 정치적인 해안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기황후의 뒤에는 권력을 쟁취하려는 고용보가 모든 것을 조정했다고 볼수 있다. 황후 답납실리 세력을 제거한 순제는 기황후를 황후 자리에 올려놓으려 했지만, 당시 실권자이던 백안이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황후 자리는 몽고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백안홀도에게 돌아갔다. 백안홀도는 매우 어진 성격으로 황후가 되고 나서도 거의 앞에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다.

고용보와 순제가 추진 하였던 일이 실패 하였지만, 기황후가 (서기 1338년)에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자 그녀의 입지는 더욱 공공해졌다. 이때에 이르러 기황후도 원나라 왕실을 계승할 왕자를 생산하자, 서서히 권력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순제는 스승 사라반과 손잡고 이듬해 백안이 퇴임하자, 조정 대신들을 겁박하여 기황후를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하였다. 기황후는 후견인 환관 고용보로부터 황후로써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학습을 받았으며, 고향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등용시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기황후는 흥성궁(興聖宮)에 거주하면서 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에 앉히고 왕실 재정을 장악하였다. 또한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기황후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은 기황후의 정치적 능력이라기 보다는 순제가 정적으로부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인 세력에게 힘을 몰아 주었던 측면이 강하다.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제2황후로 책봉되어 권력을 가지게 되자, 고려에서는 기철을 비롯한 기씨 가문들이 득세 하였다. 앞서 고려에서는 충숙왕의 장남이 1330년 불과 16세로 왕위를 이어받는데, 이 사람이 폭정의 대명사로 불리는 충혜왕이다. 그런데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기전 충숙왕은 아들을 생산한다. 이가 강릉대군 공민왕이다.

1341년 강릉대군은 원나라 순제의 입조 명령에 따라 12살에 연경에 가서는 거기서 줄곧 살게 되었다. 그런데 강릉대군이 원나라 연경에 있을 때 미천한 출신인 고려여인이 원나라 황후가 되어 있었다. 기황후와 왕족인 강릉대군이 서로 어떠한 접촉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348년 19세가 되었던 강릉대군은 원의 유력한 왕족의 일족인 위왕의 딸과 결혼했다. 그녀가 바로 노국공주이다. 이어 강릉대군은 심왕에 임명 된다. 명실상부한 고려의 2인자가 된 것이다.

어쨌든 원의 순제는 강릉대군을 제치고 충목왕의 동생을 입조하게 해서 왕위를 잇게 한다. 그가 12세에 왕이 된 충정왕이다. 그런데 충목왕이 죽고 나서 다음 왕이 즉위할 때 까지 덕녕공주는 두 사람에게 서무 결제를 대행하게 한다. 한 사람은 정승인 왕후였고 또 한 사람이 기철이었다. 바로 기황후의 오빠인 것이다.


어린 충정왕이 즉위하고 나서 고려 조정은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다. 죽은 충목왕의 어머니인 덕녕공주 세력과 살아 있는 충정왕의 어머니인 희빈 윤씨 세력 사이에 싸움이 붙은 것이다. 여기에다 남쪽에서는 왜구가 들끓게 되자 온 나라가 난장판이 되었다. 결국 원나라는 1351년 충정왕을 즉위 2년 만에 강제 퇴위 시키고 강릉대군을 그 자리에 앉힌다. 이가 공민왕이다.

한편 원나라는 계속되는 정쟁과 홍건적의난으로 인해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은 기황후는 1353년 순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고, 같은 고향출신인 환관 박불화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축하사절을 보내야 했으며, 국내에서도 성대한 축하연을 준비해야 했다. 원나라의 태자까지 참석한 개경의 축하연은 더할 수 없이 사치스럽게 열렸다. 이때 고려 공민왕은 기철보다도 못한 대우밖에 못 받았다. 원나라를 접수한 기황후는 기철을 비롯한 기씨 일족을 통해 고려를 통치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기씨 일족의 압박에 숨죽이고 있던 공민왕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355년 송나라 반란군들에게 밀리고 있었던 원나라는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때 최영을 비롯한 많은 고려 장수들이 참가 하였는데, 이들이 고려에 환국하여 원나라가 옛날 같이 않다는 소식이 공민왕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국제정세가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생각하게 하였던 것 같다.

기황후는 기철에게 요양평장대사도라는 직함을 주어 요동 일대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공민왕은 기씨 일족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고 쌍성총관부 천호인 이자춘에게 기철을 예의주시 하라고 당부해 놓았다. 이자춘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이다. 기씨 일족을 주멸할 기회를 엿보던 공민왕은 1356년 이자춘등이 기철이 쌍성의 반란민과 몰래 통하여 당을 만들고 역모를 꾸민다고 고변 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곡연(曲宴)을 베푼다는 구실로 기철과 재추(宰樞)들을 모두 대궐에 모이게 하고는, 기씨ㆍ권씨 휘하의 사람들을 참살 하였다. 가장 크게 세력을 떨치던 기씨 일족을 몰아낸 공민왕은 한결 왕권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을 추진했던 홍언박을 우정승으로 삼아 개각을 단행하고 내정 간섭을 일삼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했고, 이어 1백 년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해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기씨 일족이 참살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기황후는 당장 군사를 발동하고 싶었지만, 내부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기황후가 고려를 공격하기를 주저했던 또다른 이유는 박불화의 정치적 조언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1358년 원나라 수도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는 관에 명하여 곡식과 비단을 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박불화로 하여금 도성의 11개 문에 묘지를 두게 하여, 죽은 자의 유골 10여 만을 장사지내 주었다. 이렇듯 민심을 다독이는 행위는 기황후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박불화는 기황후의 후견인 노릇을 하며 권력의 중심에 있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때 순제는 자못 정치에 태만하고 향락에 빠져 있어 기황후와 박불화는 이번 기회를 노려 황태자를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승상 태평(太平)에게 그 뜻을 알렸으나, 태평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기황후의 선위 사건은 오히려 정치적 부담으로 남았다.


기씨 일족을 참살한 공민왕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던 기황후는 1363년 고려에 대한 군사적 행동에 나선다. 그러나 이미 대비책을 세운 공민왕에게 참패한다. 고려 원정에 참패한 기황후는 황태자를 황제로 만들려고 노력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불화의 참소로 쫒겨난 볼로드테무르가 궁정을 점령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겨우 궁전을 빠져나온 황태자는 볼로드테무르와 경쟁 관계에 있던 군벌인 쿠쿠테무르에게 찾아가 그의 군사를 빌려 1365년에 볼로드테무르를 몰아냈다.

그해 겨울 순제의 제1황후가 사망하면서 기황후는 비로소 제1황후에 책봉될 수 있었다. 공녀로 끌려온지 32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원나라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미 남쪽의 군벌 세력들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고 있었지만, 볼로드테무르와 쿠쿠테무르의 대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몽골 정권 내에서 단합이 되어 있지 못했다. 1368년 마침내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를 점령하자 원나라 왕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남편 순제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원나라 왕실은 응창부로 수도를 옮겼다가 카라코룸까지 피난했다. 피난 와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그러나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주원장에 의해 원나라가 북쪽으로 쫒겨간 상황에서 공민왕은 명과 북원 사이에서 어느쪽과 손잡을까 고민하였다. 공민왕은 일단 북원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사태를 관망하였고, 대세가 기울자 북원을 버리고 명나라와 화친관계를 수립하였다.

공민왕의 선택은 실리적 선택이었으나, 요동을 점령할 절호의 기회를 버린것은 아쉬운 점이다. 어째든 고려의 여인 기황후와 왕족인 공민왕 두사람 모두 고려의 정통성 회복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다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도적의 자손인 주원장이 한족의 정통성을 회복한 것을 볼때, 가슴 한편에서 짠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동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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