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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독립투쟁22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조선의용군의 군사 훈련 조선의용군의 군사 훈련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Korean Volunteers Army) : 조선항일의용군(朝鮮抗日義勇隊), 국제여단(國際旅團)이라고도 불렀다.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漢口, 현재 우한)에서 결성된 독립군이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된다.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게릴라전과 선전업무를 맡기도 했다. 1941년 의용대 일부가 화북으로 이동하여 분열되자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칭하였으며, 1942년 김원봉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2021. 4. 2.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조선혁명선언 조선혁명선언 ★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 1923년 중국에 망명중이던 신채호(申采浩)가 비밀 항일결사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의 선언문으로 작성한 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주의론에 반대하고 폭력투쟁적 항일투쟁노선을 정당화하고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민중의 직접 혁명 이념을 제시하였으며 반제국주의 노선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삼일 독립선언문 이후 가장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 독립사상을 밝힌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2021. 3. 31.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한인국방경비대 한인국방경비대 ★ 한인국방경비대(韓人國防警備隊) : 1942년 2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된 한인 군사조직.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하자 미주 한인사회는 한국 광복을 지원하고 대일전선 참여하고 미군 후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한인국방군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하여 허가를 얻어 1942년 한인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으며, 9월 한국광복군으로 정식 편입되어다. 1943년 미국 육군의 방침에 따라 군사조직으로의 권리를 상실하고 해산하였다. 2021. 3. 30.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설립 기념식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설립 기념식 ★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 :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 국군.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만주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1940년 9월 결성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각군의 통수권을 인수하여 통합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영국군과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CIA의 전신인 OSS의 특별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귀국하였다. 2021. 3. 30.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한국 광복군 한국 광복군 ★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 :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 국군.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만주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1940년 9월 결성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각군의 통수권을 인수하여 통합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영국군과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CIA의 전신인 OSS의 특별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귀국하였다. 2021. 3. 30.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한국 광복군 병사들 한국 광복군 병사들 노능서(왼쪽), 김준엽(가운데), 장준하(오른쪽) ★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 :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 국군.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만주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1940년 9월 결성되었다.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각군의 통수권을 인수하여 통합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영국군과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CIA의 전신인 OSS의 특별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귀국하였다. 2021. 3. 26.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한인애국단의 활동 한인애국단의 활동 ★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 1931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가 일본의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이봉창 의거(1932), 윤봉길 의거(1932) 등의 활동을 하하며 일본에 저항하였다. 거사 이후 1936년까지 언론을 통해 이봉창·윤봉길 등에 대한 추모 활동을 하였고,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2021. 3. 15.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조선의용군의 이동 경로 조선의용군의 이동 경로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Korean Volunteers Army) : 조선항일의용군(朝鮮抗日義勇隊), 국제여단(國際旅團)이라고도 불렀다.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漢口, 현재 우한)에서 결성된 독립군이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된다.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게릴라전과 선전업무를 맡기도 했다. 1941년 의용대 일부가 화북으로 이동하여 분열되자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칭하였으며, 1942년 김원봉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2021. 3. 13.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신흥무관학교의 영농 작업 신흥무관학교의 영농 작업 ★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 1911년 서간도(길림성 통화시 류하현)에서 개교한 독립군 양성 기관. 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의 전신.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등에 참여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2021. 3. 13.
[일제강점기/해외독립운동]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 2021. 3. 7.
[일제강점기/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 광복군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 광복군의 활동 ★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4월 11일 ~ 1948년 8월 15일) :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 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으며,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 2021. 3. 7.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사격 훈련 중인 한국 광복군 사격 훈련 중인 한국 광복군 ★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 :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 국군.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만주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1940년 9월 결성하여되었다.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각군의 통수권을 인수하여 통합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과 독이레 선전포고하고 영국군과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CIA의 전신인 OSS의 특별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귀국하였다. 2021. 2. 27.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김두봉 김두봉 ★ 김두봉(金枓奉, 1889~1961?)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한글학자. 공산주의자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정치인. 주시경의 수제자로 한글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잠시 활동하였고, 이후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월북하여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 패하여 숙청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망 시점은 미상이다. 2020. 12. 31.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 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1919년 북간도에서 만든 무장독립운동 단체. 대종교 계통에서 비롯되었으며, 1919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서일 김좌진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중국 왕칭에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였다. 2020. 12. 22.
[근대/독립운동가] 나철 나철 ★ 나철(羅喆, 1863~1916) : 조선 말기의 문신, 대종교의 창시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904년 호남의 지식인들과 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을사조약 체결 이후 자신회를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시도하였다. 그 후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해 오기호 등과 함께 1909년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를 창시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하여 수많은 대종교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6년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20. 10. 27.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김좌진 김좌진 ★ 김좌진(金佐鎭, 1889~1930) :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인. 충청남도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고 가노 해방 및 전답을 무상 분배, 교육사업과 언론운동을 펼쳤다. 무관학교 졸업 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18년 만주로 망명, 무오 독립선언에 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역임하였고,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 2020. 10. 26.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홍범도 홍범도 ★ 홍범도(洪範圖, 1868~1943) : 조선 말기의 의병장,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군인.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다. 1895년부터 의병 활동을 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잠입하여 일본군을 습격하였고,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봉오동 전투), 청산리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 2020. 10. 25.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청산리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일본군 청산리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일본군 ★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이라고도 한다. 1920년 10월 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 일제는 중국 마적일 일으킨 훈춘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였고,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 2020. 10. 25.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 ★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이라고도 한다. 1920년 10월 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 일제는 중국 마적일 일으킨 훈춘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였고,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한국 독립군이 러시아로 건너.. 2020. 10. 25.
[일제강점기] 해외의 독립운동 해외의 독립운동 2020.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