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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삼국·남북국

[스크랩]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의 차이

by hwawoon 2013. 7. 16.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507년 10월 미상 음력 고구려와 말갈이 연대하여 침입하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 (高老)가 말갈 과 함께 한성 [註 001] 을 치기 위하여 횡악 ( 橫岳 ) [譯註 001]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譯註 002]

 

註 001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을 하고 있을 당시의 수도의 명칭. 그러나 수도 한성은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므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의 한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히 하기 어렵다. 이를 稷山의 慰禮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기백,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는 475년 장수왕때 이곳을 점령하였는데 백제때 사용한 당시 <횡악>을 그대로 산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卷第十九 髙句麗本紀 第七 507년 미상 음력 백제를 공격하다
왕이 장군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 과 더불어 백제의 한성 (漢城)을 공격하려고 횡악 (橫岳) [註 001] 아래에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역습하여 싸우므로 물러났다. [譯註 001]

 

註 001
횡악(橫岳)은 현재의 서울 北漢山 이다. 金正浩의 《대동지지》권1 漢城府 山水條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에 “三角山 距府北十五里 百濟稱 負兒岳 又云橫岳 又云華山”이라 하였다.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400쪽)

 

譯註 001
《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 무녕왕 7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에 같은 내용이 보인다.

 

* 백제때는 횡악, 신라때 부아악, 조선시대에 별칭으로 화산이라고 하였는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百濟稱 負兒岳 又云橫岳 又云華山>라 하여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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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으로 보면 같은 내용을 삼국시기 <주>에서는 각기 다르게 표현합니다.


백제본기에서는 475년 개로왕이 죽고 웅진으로 천도하였으니 한성과 <횡악>을 공주의 위치로 비정하는 한편

고구려본기는 한성과 <횡악>을 이전 그대로 한양과 북한산으로 비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어떤기록이 맞을 지  나름대로 생각하다가 결론적으로 고구려본기 내용이 맞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475년 장수왕의 내침에도 불구하고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기 전인 538년 까지 여전히 한강유역은 백제가 영향력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그에 대한 내용으로 본 카페의  

http://cafe.daum.net/alhc/3Cdg/384  에 있는 글을 참조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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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21년(AD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도읍지 한성을 비롯하여 한성백제가 초토화 된 후 문주왕은 공주로 천도를 하게 되지만, 백제의 웅진시대에도 성왕 31년(AD 553년) 신라가 백제의 동 북변을 취하여 신주를 설치하기 전까지도 한성지역은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병도는 이를 두고 신빙성이 없다고 일축하지만, 엄연한 역사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그냥 무시하거나 덮어 버릴 사안이 아니라, 문주가 공주로 천도한 후 한성시대 옛 도읍지인 한성과 한강유역에는 어떤 역사적 비밀이 있었는지 밝히는 것이 학자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그러면 여기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웅진시기와 사비시기 성왕 조에 나타나는 한성과 한강유역의 기사를 검토해 봄으로서 78년간의 한강유역의 정세를 조금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문주왕조에 <개로가 재위한 지 21년에 고구려가 내침하여 한성을 포위하므로 개로가 농성하여 굳게 지키고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청하게 하였는데 문주는 군사 1만 명을 가지고 돌아왔다. 고구려 병이 비록 물러갔으나 성은 함락되고 왕은 돌아갔으므로 드디어 즉위하였다>라는 기사에서 우리가 유의해서 보아야할 점은 문주가 신라에서 구원병을 데리고 왕도 한성에 돌아왔으나 성을 공격했던 고구려군사들이 한성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은 함락되고 왕도 죽었지만 고구려군사들은 승전 후 한성에서 철수하여 이미 돌아간 상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당시 한강 유역은 백제의 땅도 고구려의 땅도 아닌 무주공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서 문주왕 2년(AD 476년) 조를 보면 <2년 2월에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강이북의 민호를 이주시켰다>라고 하여 한강유역이 초토화 되고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한 후 그 다음해 개로왕은 대두산성(한강 이남의 기존에 있던 산성으로 추정)을 수리하여 한강 이북에 있던 민호를 보다 안전한 한강 이남으로 이주를 시킨다. 이 대목에서도 만약 한강 이 남북이 고구려의 수중에 완벽하게 들어간 상태라면 어떻게 한강 이북의 백제민호를 한강 이남으로 이주를 시킬 수가 있었겠는가. 이때까지만 해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퇴하여 공주로 도망치듯 천도한 백제지만 고구려 군이 철수하여 무주공산이 된 한강유역의 영향권은 백제가 서서히 쥐어 가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면 여기에서 동성왕조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자.

동성왕4년(AD 482년) <9월에 말갈이 한산성(지금의 남한산성으로 추정)을 습파하고 300여 호를 노획하여 돌아갔다.>하여 동성왕4년에도 한성시대의 도읍인 한성의 배후산성인 한산성에는 백제의 민호가 살고 있었으며 한성지역이 그때 까지만 해도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듬해 동성왕5년(AD 483년) <봄에 왕이 사냥으로 한산성(지금의 남한산성으로 추정)에 이르러서 군민을 위문하고 협순(10월)에 돌아왔다.>라고 하여 말갈의 공격으로 피폐해진 백제의 한산성을 위문하고 몇 달(순무기간을 최소6개월 이상으로 추정)만에 웅진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한산성은 분명히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더욱이 왕이 군민을 위문한 것으로 보아 당시 한산성에는 민호뿐만이 아니라 백제의 군사도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동성왕21년(AD 499년) 조에 <한산 사람이 고구려로 도망하여 가는 자가 2000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여 한산지역의 백제사람 2000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하여 이때에도 한강유역이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동성왕21년은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백제 사람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일어나 살기가 힘든 관계로 고구려와 인접한 지역인 한산 사람이 고구려로 도망가지 않았나 추정된다.

 

이와 같이 웅진시대에 백제의 한강유역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웅진시대 전 시대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백제 무령왕 조에도 어김없이 한강 유역의 한성과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엄연히 실려 있는 역사적인 사실 임에도 “신빙성이 없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 “기사 속의 한성은 한강유역의 한성이 아니라 다른 곳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일축해 버린다면 이는 학자적 양심에 위배되며 학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팽개치는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특히 무령왕 조에 나오는 한성관련 기사는 분명히 한강유역의 한성임을 지리적으로 입증하는 기사가 함께 실려 있어서 주목된다.

 

무령왕 원년(AD 501년) <11월에 달솔 우영을 시켜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수곡성을 치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에서 언급된 수곡성은 과연 어디일까?

이병도는 황해도 신계로 비정하고 있다. 백제 한성기 근초고왕 30년(AD 375년) <7월에 고구려가 한성백제의 북변을 공격해 와서 수곡성을 함락시켰다>는 기사로 볼 때 한수 이북 고구려와의 국경지대 어느 지역임이 틀림없다.

 

무령왕 3년(AD 503년) <9월에 말갈이 마수책을 태우고 고목성으로 진공하니 왕이 5000명을 보내어 이를 격퇴하였다.>라는 기사에 나오는 마수책과 고목성도 백제 한성기 온조왕 8년(BC 11년) 조에 보이는 마수성과 다루왕 4년(AD 31년) 가을 8월에 <고목성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00여명의 목을 베었다.>는 고목성으로 보여 이 또한 한강유역의 전투기록임이 틀림없다.

 

무령왕 6년(AD 506년) <7월에 말갈이 침범해 와서 고목성을 깨뜨리고 600여 명을 죽이고 잡아갔다>거나 무령왕 7년(AD 507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두 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을 쌓아서 말갈에 대비하였다.>라는 기사에 나오는 고목성도 무령왕 3년 조 기사에 나오는 고목성과 같이 한강유역 어느 지역임이 틀림없다.

 

무령왕 7년(AD 507년) 조의 기사에 <10월에 고구려의 장수 고로가 말갈과 공모하여 한성을 치려하니 횡악 아래에 진둔 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격퇴하였다.>라고 하여 백제 한성을 치려고 고구려군사와 말갈군사가 모인 장소가 횡악 아래인데 횡악이 정확하게 어느 산을 지칭하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는 없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제2, 제3(백제 한성기)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한수 이북 어느 지역임은 확실해 보이므로 무령왕 7년 10월에 고구려 말갈이 공모하여 치려했던 백제의 한성도 분명히 한강유역의 한성 즉 백제의 한성기의 도읍지인 한성임이 틀림없다.

무령왕 7년 조에 나오는 한성 관련기록으로 보아 개로왕 21년 (AD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백제왕도 한성이 무령왕 7년(AD 507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려 30여년 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무령왕 12년(AD 522년) 조에<9월 고구려가 가불성을 공취하고 군사를 옮겨 원산성을 깨뜨리고 살육과 약탈함이 매우 많았다>라는 기사에 나오는 원산성도 백제 한성기 온조왕 26년(AD 44년) 조에 나오는 원산성과 동일한 성으로 보여 이 또한 한강유역 어느 지역임이 틀림없다.

 

다시 무령왕 23년(AD 523년) 조의 기사에 <2월에 왕이 한성에 가서 좌평 인우, 달솔 사오 등을 명하여 한수 이북 주군의 백성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았다. 3월에 한성으로부터 돌아왔다.>

이 대목에서도 이병도는 그의 저서에서 <백제 남천 이후의 기재 중에 왕왕 한수 유역 내지그 이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모두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전과 같이 역사적인 사실을 깊은 연구와 이해도 없이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면서 웅진시기 백제의 한강 유역 경영사실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무령왕 23년 조의 기사를 다시 분석해 보면 무령왕이 쌓기를 명한 쌍현성도 백제 한성기의 기사를 분석해 보면 한강 유역의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백제 최고의 관직인 좌평과 달솔에 명하여 한수 이북 주군의 백성을 총동원 한 것만 보아도 매우 중요한 축성사업 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무령왕 당시의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기록을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한강 유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병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기록들도 모두 다 믿을 수 없고 조작된 것이란 말인가.

 

그러면 다시 성왕대의 기록을 살펴보자.

성왕 원년(AD 523년) <8월에 고구려 병이 패수에 이르므로 왕이 좌장 지충에게 명하여 보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이를 물리쳤다.>라고 하여 무령왕 대 뿐만 아니라 성왕 대에도 고구려와의 전투가 한강 이북에서 치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백제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지 못했다면 고구려와의 전투가 패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성왕 7년(AD 529년) <10월에 고구려왕 흥안(안장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변의 혈성(이병도는 위치미상이라고 했지만 혈성은 지금의 강화를 가리킨다.)을 함락하였다.>라고 하여 당시 백제의 점령 하에 있던 한강하류의 강화도를 고구려군사가 침입한 것으로 보아 웅진시대에도 백제의 한강 유역 점령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 말고도 성왕 대에도 고구려와의 전투기록에 두 번이나 나타나는 한강 이북의 독산성 전투도 백제 한성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 또한 한수 이북의 성이 틀림없어 웅진백제의 한강유역 점령사실에 힘을 보태주고 있다.

 

장수왕의 한성공략으로 부득이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는 즉위 이듬해부터 피폐해진 한강유역의 옛 도읍지를 다시 챙기기 시작하여 웅진시대 내내 후왕들을 포함하여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 성왕 때까지 옛 영토인 한강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고구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특히 성왕의 사비 천도는 고구려와의 지난한 한강유역 쟁탈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약과 고구려의 웅진 공략을 우려해 사비로 천도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왕7년(AD 529년)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안장왕)과의 혈성(지금의 강화)전투에 이어 백제군사 보. 기병 3만 명이 투입된 오곡원 전투에서도 연이어 패한 후 왕16년(AD 538년) 봄 사비로 천도를 결심하게 된 것 같다. 성왕은 사비천도 후에도 왕26년(AD 579년) 봄 고구려 왕 평성(양원왕)과의 한강 이북의 독산성 전투마저 위태롭게 되자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게 되고, 이어 겨울 10월에 양나라에도 조공하며 구원병을 청해 보지만 경의 난(양나라의 난)으로 별효과 없이 환국하게 되고, 


그 후 다시군사 1만 명으로 왕 28년(AD 581년) 봄 정월에 고구려 도살성을 쳤으나 그때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 3월에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하는 위기상황에서 그동안 아군으로만 알았던 신라에게 성왕31년(AD 584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동. 북의 변읍을 빼앗고 신주를 설치하자 겨울 10월에 딸을 신라로 시집보내면서까지 최후의 화해 제스처를 써 보았지만 물거품이 되자 왕32년(AD 586년)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려고 친히 보.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지금 수원의 구천으로 추정됨, 이병도는 지금의 이천으로 비정함)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 함께 싸우다가 난병에게 해를 입고 돌아갔다.


웅진시대의 백제왕들은 하나같이 한강유역의 잃어버린 고토 한성지역의 수복과 사수를 위해 최선을 다해 고구려와 전투를 벌였고 특히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천도하면서 까지 목숨 걸고 싸웠지만 마지막에 신라의 배신으로 목숨까지 잃게 되고 한강유역의 영토를 신라에게 빼앗기면서 드디어 한강유역은 신라의 한주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웅진시대의 전투기록에서 보았듯이 그 대부분의 전투는 한강유역에서 벌어진 고구려와의 전투이다. 일부 신라와의 전투도 거의 대부분이 한강유역에서의 전투이며 신라는 70여 년 간의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백제와 고구려의 지난한 전쟁 끝에 어부지리로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성왕은 왜 고구려와의 치열한 전쟁 중에 사비로 천도를 했을까?

백제의 성왕은 한강유역을 고수하기 위해 고구려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왕 7년에 벌어진 혈성전투와 오곡원 전투에서 패하자 고구려가 웅진마저 유린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장수왕의 공격을 받은 개로왕의 심경이라고나 할까.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 치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개로왕은 문주를 한성 밖으로 내 보냄으로서 자신은 비록 죽임을 당하고 한성백제가 멸망하였지만 문주가 웅진으로 천도함으로서 나라의 맥을 잇게 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성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직접 군사를 진두지휘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구려 군사에게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의 혈족마저 해를 입고 웅진성 마저 유린당해 나라가 멸망의 길로 내몰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사비로 천도를 단행하여 왕족을 포함한 종묘 사직을 보전해 후사를 도모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성왕이 사비로 천도를 하지 않고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면 백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대답은 자명하다.

백제는 사비시대를 열지 못하고 웅진시대를 끝으로 멸망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왕이 사비천도를 단행한 것은 분명히 고구려와의 78년(문주왕-성왕)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함인데 결국은 고구려 군사가 아닌 신라군사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또 하나의 숙제거리이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자이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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