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종이가 생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전주와 남원이 대표적인 생산지였다. 명나라 화가 동기창(董其昌)이 조선의 종이는 두껍고 질기며 희고 매끈하여 서예와 회화에 아주 적격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조선 종이의 품질은 우수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종이는 문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매체뿐 아니라, 공예품, 생활 소품 등으로 활용범위를 확장하였다. 돈, 지갑, 창호지, 모자, 부채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면서 종이의 종류도 용도에 맞게 매우 다양해졌다.
조선은 1415(태종 15)년 종이를 만드는 관아인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여, 1882년까지 존속하면서 종이의 수요를 감당했다. 1420년에는 서울 세검정 에 조지서를 두어 여러 색지를 만들기도 했다.
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Henri Zuber)는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외규장각 의궤 를 보고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질 좋은 종이에 감탄하기도 했다. 조선은 학자들의 나라답게, 책을 많이 가진 나라였고, 그 만큼 많은 종이가 소비된 나라였다.
우리 종이의 쇠퇴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서양의 종이가 도입되면서 우리의 종이는 차츰 사양화되었다. 기계로 만든 서양 종이에 비해 우리 종이가 원료 공급 및 제작 과정에서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기가 우리 전통 기술과 문화 발전에 큰 장애가 된 탓도 있다. 현재 서양 종이는 다량의 출판 인쇄물, 복사용지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종이(한지)가 서양 종이처럼 널리 사용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종이 공예품과 고급 인쇄물 등의 용도로 다시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종이가 다시 널리 사용되는 시기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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