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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삼국·남북국

[스크랩] 한구생활사 6 - 종이(네이버캐스트 11,16일자에 올린 글)

by hwawoon 2011. 11. 16.

종이는 화약, 나침반과 함께 중국의 3대 발명품이라고 불린다. 우리나라는 중국 다음으로 일찍부터 종이를 사용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조상들은 종이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종이의 발명

종이는 글과 그림을 기록하기 위한 기록매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다양한 기록매체를 사용했다. 수메르인들은 점토판 위에 문자를 새겼고,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5왕조(BC 2494∼2345)시대부터 파피루스를 사용했으며, 인도인들은 종려나무 잎에 글씨를 썼고, 유럽인들은 양가죽에 문자를 기록하다가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에 의해 양피지가 발명되었다.

종이를 만들기 이전, 중국인들은 갑골, 청동기, 목간, 죽간, 실크 등에 글자를 기록했다. [사기]의 ‘골계열전’에 의하면, 동방삭(東方朔)이 한나라 무제(武帝)에게 상서를 올렸는데, 그 양이 무려 3,000편의 죽간이어서 두 사람이 들고서야 겨우 궁전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죽간이나 목간은 이처럼 무겁고 부피가 커서 사용에 불편함이 많았다.

처음에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낡은 마(麻) 섬유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종이 유물은 중국 감숙성 천수시 방마탄 한나라 고분에서 발견된 방마탄지(放馬灘紙)로, 기원전 180〜124년대의 것이다. 이 밖에도 파교지, 마권만지, 옥문지 등 여러 종이들이 발견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기 105년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기존의 종이를 개량해 나무껍질, 마, 해진 천, 그물 등을 활용해 물에 불리고, 돌절구에 넣어 찧고, 불을 피워 삶고 다시 물을 빼서 말린 ‘채후지’라는 종이를 만들어냈다. 이로써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製紙(術)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고구려, 종이를 사용하다

고구려 집안(통구)시의 통구사신총 벽화의 일부분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신선의 모습이다.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술은 대략 3세기 중엽에 우리나라와 베트남에 가장 먼저 전해졌다. 고구려와 백제가 먼저 사용하고, 신라는 다소 늦었다. 고구려에서 사용된 종이 가운데 유물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은 4〜5세기경 유물로 추정되는 것으로, 평양 모란봉 동쪽 청암동토성에서 불꽃뚫음무늬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마지(麻紙)와, 평양 대성산성 돌함 안에서 발견된 불경(佛經)이 적혀진 종이다. 이 종이들은 고르고 치밀하게 엉키어져 있는 삼섬유로 만들어졌다. 고분벽화를 통해 보면,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3호분 서쪽 측실 벽화에서도 종이를 볼 수 있다. 무덤 주인공에게 보고하는 신하가 들고 있는 문서가 목간보다는 종이로 보인다. 6세기에 만들어진 통구사신총에는 책상에 종이를 놓고 먹을 묻혀 붓으로 글을 쓰려고 하는 신선이 그려져있다.

고구려에서 종이가 사용된 까닭은 문서행정의 필요성과 서적, 특히 불교 경전의 수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7대 소수림왕은 372년 태학을 설치하여 학문을 가르쳤고, 다음해에는 법률인 율령을 반포했다. 아울러 불교를 승인하여 사찰을 건립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서적의 수요가 늘고, 통일된 법령인 율령을 시행하면서 행정 문서가 늘어났으며, 불교 경전을 제작하기 위한 종이 수요가 늘었다. 삼국시대의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기술자인 경우가 많았다. 610년 담징 스님이 일본에 종이, 먹 등을 만드는 법을 전한 것처럼, 사찰은 종이를 직접 제작한 곳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불교를 신라보다 일찍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른 시기부터 한(漢)나라를 비롯한 중국세력과 잦은 교류를 하다 보니, [사기], [문선] 등 다양한 서적들을 수입해 갖고 있었다. 따라서 종이로 책을 만드는 방법을 일찍 터득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종이를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서화사(書畫史)]에는 수, 당나라에서 좋은 글과 그림은 고려지(髙麗紙)로 맨 앞 표지를 장정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고려지’는 고려시대에 송나라로 수출한 질 좋은 종이를 말한다. 그런데 [담원찰기(湛園札記)]에는 “건중(建中) 원년(780년)에 왜국의 사신이 와서 방물을 바쳤는데,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는 견지(繭紙-누에고치로 만든 종이)와 윤이 나는 것이 비슷하여,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것이 지금의 고려지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고려지는 고려(918〜1392)가 아닌 고구려에서 만들기 시작한 종이임을 알 수가 있다.

너무나 비싼 종이

고구려가 종이를 수출할 정도였다고 해도, 당장 종이가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다. 408년에 만들어진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마사희(馬射戱) 장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화살이 목표에 몇 개 맞추었나를 기록하는 주기인(注記人)은 나무에 글을 적고 있다. 귀족들이 즐긴 놀이 장면이었지만, 종이가 아닌 나무, 즉 목간(木簡)에 그들이 과녁을 맞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목간이 쓰인 것은 종이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값비싼 귀중한 물건인 만큼 종이는 관청을 통해 철저히 관리되었다. 경주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2호 목간에는 종이구입과 관련한 내용이 적혀있다. 어떤 관청에서 종이를 구입하라는 명령을 했고, 담당자가 경(經)에 쓸 희지 않은 종이 2근(斤)을 아직 보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연구자마다 약간의 해석 차이는 있어도, 경전에 쓰이는 종이의 구입과 관련하여 관청에서 사용된 문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는 토지제도인 전시과를 제정하면서 지방 관청의 운영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공해전시(公廨田柴)를 지역의 인구 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500정(丁) 이상인 주와 현에는 지전(紙田) 15결, 100정 이상의 주, 현에는 10결, 20정 이하에는 지전 7결, 향부곡(鄕部曲) 등에도 인구에 따라 5결, 3결, 2결을 지급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사용될 종이를 구입하기 위해 특별히 땅을 준 이유는 문서 행정에 필요한 종이의 값이 당시에는 매우 비쌌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활쏘기 결과를 기록하는 사람. 종이가 아닌 목간에 결과를 적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이의 재활용

비싼 만큼, 종이는 철저하게 사용되었다. 한번 사용한 종이는 뒷면을 다시 활용했고, 다 사용한 종이일지라도 버리지 않았다. 752년에 만들어진 [좌파리가반(佐波理加盤)] 문서를 보자. 이것은 앞면에는 관청에서 돼지고기, 말고기, 쌀, 콩을 받는 내용을, 뒷면에는 벼를 도정(搗精)시킨 내용을 기록한 문서인데, 폐기된 후 일본에 수출할 사발의 포장재로 재활용되어 일본 정창원(正倉院- 왕실 유물창고)에 보관되었다가 사발과 함께 발견되었다. 신라 [촌락문서(村落文書 ; 695년?, 755년?)]의 경우는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의 책 표지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 삼베와 함께 속지로 넣어져 활용되었다가 발견되었다. 폐기된 문서 가운데는 옻칠그릇의 종이덮개로 사용된 것도 있는데, 옻의 건조를 막고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는 데에는 통풍이 잘 되는 종이가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서를 칠지문서라고 하는데, 옻이 스며든 문서는 건조나 부식이 되지 않아 오래 남는다.

값싼 목간을 사용하다

신라 경덕왕 때인 755년에 만들어진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국보 196호)]에는 이것을 만들게 된 사연을 끝부분에 적어 놓고 있다. 여기에는 화엄경을 베껴 쓰게 된 과정에서 관련된 인물들의 출신지, 성명, 관 등이 적혀있다. 이들은 지작인(종이를 만든 자) 1인, 경필사(불경을 베껴 쓰는 자) 11인, 경심장(두루마리 맨 끝에 붙이는 축(軸)을 만드는 전문가) 2인, 불보살상필사(경문 앞에 붙이는 불보살상 그림 그리는 자) 4인, 경제필사(사경의 마지막에 제목을 써넣는 전문가) 1인을 포함해 총 5종 19인이다. 이 가운데 지작인과 경필사는 모두 광주 5인, 남원경 2인, 정읍 4인 등 옛 백제 지역 출신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상당히 높은 관직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종이를 만든 황진지라는 사람의 관등은 ‘내마(柰麻)’로, 이는 신라 관등 가운데 11위를 차지하며 5두품이 할 수 있는 관직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관직도 내마, 또는 대사(大舍-12위)다. 이들은 숙련된 기술자였던 것이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백제 목간의 다양한 모습


값비싼 종이에 함부로 글을 써서 종이를 버릴 수는 없으므로, 종이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습이 필요하다. 이 경우 연습은 종이가 아닌 목간을 사용했다. 현재까지 대략 500여점 이상의 목간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목간은 나뭇가지를 베어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가격 부담이 없다. 또한 글을 쓰고 고치려고 하면, 칼로 나무껍질을 베어내면 된다. 따라서 현재 발견된 목간에는 글자를 연습한 것, 낙서한 것, 잘못 쓴 글 등을 볼 수 있다. 목간은 종이에 정식 문서를 쓰기 전에 관리들이 모은 정보를 기록하기도 하고, 물건에 붙인 꼬리표로도 사용되었다. 함안 성산산성에서는 7세기 초 여러 지역에서 보내온 물건에 붙은 꼬리표 목간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꼬리표 목간은 고려시대 침몰선 발굴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목판 인쇄와 종이

우리 역사에서 종이 사용이 크게 늘어난 계기로는 7세기 후반 삼국통일 전쟁을 치르면서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에게 불교가 널리 퍼진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라 불경을 읽고자 하는 수요도 늘어났다. 내용이 많은 불경을 언제까지 베껴서 보급할 수는 없는 터. 결국 신라는 목판 인쇄술을 발전시켜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8세기 초)을 탄생시켰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로 책의 공급이 원활해지자, 종이 수요도 늘고, 따라서 종이 만드는 기술도 발전했다.

고려지 - 고려의 주요 수출품

신라에서 만든 종이는 ‘계림지(鷄林紙)’라 불리며 당나라에도 수출되기 시작했다. 신라 종이는 닥나무 껍질을 두드려서 만든 하얗고 반질반질한 종이라는 뜻으로 ‘백추지(白硾紙)’라고도 불렸다. 신라시대에 만든 종이는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딜 만큼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이런 기술은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서천 추동리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문서 (1119년, 또는 1179년의 것으로 추정됨)

송나라 때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보면 '고려의 닥종이는 밝은 빛을 내므로 모두들 좋아하며 이를 일러 백추지(白錘紙)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종이는 송나라에서 비단 종이(繭紙)라 여겨져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종이는 고려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고려사]에는 종이 생산을 위해 인종 23년(1145년)에서 명종 16년(1186년)에 걸쳐 전국에 닥나무를 재배할 것을 명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국가적으로 종이 만드는 것을 장려했던 것이다. 종이 만드는 장인은 공조서(供造署)라는 국가기관에 예속되어 있었고, 종이를 만들어 국가에 바치는 특수 지방 행정 단위인 지소(紙所)도 운영되었다. 고려는 958년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에 능통한 자들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로 인해 유교 경전이나 문장을 공부하는 자들이 늘어나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 또한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불경에 대한 수요도 더욱 커졌다. 때문에 종이의 공급과 수요 모두 크게 늘었으므로, 종이 가격 또한 크게 떨어졌다.

조선의 종이

1.운룡지 2. 장지 3. 화선지

4. 표백하지 않은 순지 5. 표백한 순지 6. 피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종이가 생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전주와 남원이 대표적인 생산지였다. 명나라 화가 동기창(董其昌)이 조선의 종이는 두껍고 질기며 희고 매끈하여 서예와 회화에 아주 적격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조선 종이의 품질은 우수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종이는 문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매체뿐 아니라, 공예품, 생활 소품 등으로 활용범위를 확장하였다. 돈, 지갑, 창호지, 모자, 부채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면서 종이의 종류도 용도에 맞게 매우 다양해졌다.

조선은 1415(태종 15)년 종이를 만드는 관아인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여, 1882년까지 존속하면서 종이의 수요를 감당했다. 1420년에는 서울 세검정 에 조지서를 두어 여러 색지를 만들기도 했다.


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Henri Zuber)는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외규장각 의궤 를 보고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질 좋은 종이에 감탄하기도 했다. 조선은 학자들의 나라답게, 책을 많이 가진 나라였고, 그 만큼 많은 종이가 소비된 나라였다.

우리 종이의 쇠퇴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서양의 종이가 도입되면서 우리의 종이는 차츰 사양화되었다. 기계로 만든 서양 종이에 비해 우리 종이가 원료 공급 및 제작 과정에서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기가 우리 전통 기술과 문화 발전에 큰 장애가 된 탓도 있다. 현재 서양 종이는 다량의 출판 인쇄물, 복사용지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종이(한지)가 서양 종이처럼 널리 사용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종이 공예품과 고급 인쇄물 등의 용도로 다시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종이가 다시 널리 사용되는 시기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한치윤 저, 민족문화추진회 옮김, [(신편 국역) 해동역사(海東歷史)], 한국학술정보, 2008; 한국고대사회연구소, [강좌 한국고대사5- 문자생활과 역사서의 편찬],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2;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저, 장연ㆍ김호림 옮김, [중국문명대시야] 1, 김영사, 2007;이용현, [한국목간 기초연구], 신서원, 2006; 국립중앙박물관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전시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1;황수영, [新羅 白紙墨書華嚴經], [미술자료] 24집, 국립중앙박물관, 1979;조선기술발전사편찬위원회, [조선기술발전사] 2, 3, 4, 5권,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6;H.쥐베르, CH.마르탱 저, 유소연 옮김, [프랑스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살림, 2010.

  1.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신라시대 백지에 먹으로 쓴 [대방광불화엄경]을 말한다. 당시의 불교사상을 비롯해 신분질서와 사회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로, 국보 제 196호로 지정되었다.
  2.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1996년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다라니경 인쇄본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기도 하다. 704~751년 경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 인쇄문화의 높은 수준을 입증한 국보 제 126호 유적이다.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1.11.16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김용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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