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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사진자료실/근대

[일제강점기/무장독립투쟁]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by hwawoon 2017. 6. 2.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전개해 나간다.

 

★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이라고도 한다. 1920년 10월 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 일제는 중국 마적일 일으킨 훈춘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였고,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한국 독립군이 러시아로 건너가 소련군에게 학살되는 등 큰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