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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정지(望遠亭址)

by hwawoon 2016. 4. 1.

 


 

 

 

 

 

망원정지(望遠亭址)




- 탐방장소 : 망원정지

- 탐장날자 : 2016년 1월 2일

 

    



 

  멀리 있는 유적은 일부러 찾아가서도 보는데 지척에 있는 곳은 언제든지 갈 수 있어서인지 오히려 소홀히 여긴다. 새해가 되면 꼭 가보자고 생각했던 곳을 하나둘 씩 가려고 노력 중이다. 망원정지(望遠亭址)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새해 둘째날에 망원정에 다녀왔다.





강변북로를 따라 이어진 작은 샛길

앞에 보이는 작은 문 위의 정자가 망원정이다   


 




   망원정을 가는 길은 썩 편하지는 않았다. 한강공원에서 올라와 망원정 북서쪽 방향에서 걸어갔다. 망원동 빗물펌프장 앞에는 ‘망원정 마당’이라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원을 지나 강벽북로를 따라 이어진 좁을 샛길을 따라 망원정을 향했다.






다른 정자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정자의 뒤편 모습이다






동남쪽으로 난 망원정지의 출입문






   샛길 끝 작은 문을 지나 망원정에 다다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범해 보이는 정자였고 앞으로는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망원동의 주택가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현판이 두 개라는 점이다. 정자의 바깥쪽에는 성종이 내린 <망원정(望遠亭)>이라는 이름이, 안쪽에는 세종이 내린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정자  안쪽에 걸린 <희우정> 현판

세종대왕이 이곳을 찾았을 때 오랜 가뭄을 적시는 단비가 내려

"비가 옴을 기뻐한다"는 뜻의 희우정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멀리 한강이 내려다 보인다





 

 가까이서 본 <희우정> 현판






   망원동(望遠洞)은 망원정(望遠亭)에서 유래되었다. 망원정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 효령대군이 별장으로 지은 정자(亭子)였다(세종 6년, 1424년). 한강을 굽어볼 수 있는 양화진 언덕에 자리잡은 이 정자는 풍광이 수려하여 명소로 이름이 높았으며 조선시대 수상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효령대군은 이 정자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어쩌면 동생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한 울분을 달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자를 지은 다음해(세종 7년, 1425년) 세종은 오랜 가뭄에 백성의 생활을 살피고자 궐 밖에 나왔다가 형의 별장인 정자에 들렀다. 정자에 오르는 순간 비가 내리자 세종은 몹시 기뻐하며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정자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하였다. 정자 안쪽에 걸린 희우정 현판의 유해가 이러하다. 당시 명필로 이름난 부제학 신장(申檣)에게 글씨를 쓰고 명문장가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록을 맡겨 <동문선>의 <희우정 기문>이 전한다. 세종은 이후에도 희우정에 여러 번 들러 수군의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백성의 생활을 시찰하기도 했다고 한다. 렀다. 희우정이 세워진 양화진은 조선시대 수상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희우정에 나와 수군의 군사훈련을 참관하기도 하였다.







한강을 바라보는 정자 정면에 걸린 <망원정> 현판

"멀리 바라본다"는 뜻으로 망원동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세월이 흘러, 희우정의 주인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으로 바뀌었다. 성종은 형을 위해 별장을 증축하고 망원정(望遠亭)으로 정차 이름도 고쳤다. “아름다운 경치를 멀리 바라본다”는 뜻의 망원정에는 왕이 되지 못한 형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성종의 뜻이 아니었을까. 신기하게도 이 정자의 주인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이었다. 성종도 세종처럼 자주 행차하여 군사훈련도 참관하고 신료들과 함께 시문(詩文)을 짓기도 했다. 양화진은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 높아 명나라 사신들도 조선에 올 때 망원정을 들르곤 했다.

    

 

   성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燕山君)은 망원정을 천여명이 앉을 수 있는 대규모 정자로 만들고 이름도 수려정으로 고치고 한강 풍경을 즐겼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폐주(廢主)가 되어 쫓겨났고 수려정 현판도 사라졌다. 사연 많은 이 정자에는 다시 망원정 현판이 걸리었고, 조선의 여러 왕들이 수군의 훈련을 참관하고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것을 오롯이 지켜보았다. 실록에는 조선 후기까지 여러 왕들의 망원정에 거동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망원정지 옆의 다세대 주택

망원정지의 담장은 이 집을 피해 구부러져 있다




 

   그러나, 대학제국의 멸망과 함께 왕이 찾는 정자라는 명성은 희미해졌고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한강의 개발로 허물어져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졌다. 개발의 광풍이 지나간 뒤, 1986년부터 복원과 발굴이 시작되어 1989년 다시 세워져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서울시특별시 지정 기념물 9호로 지정하였다. 제대로 된 유구(遺構)도 없는 상태에서 옛 기록과 발굴로 찾은 석재를 토대로 지었기에 제 모습을 찾았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이곳은 망원정(望遠亭)이 아니라 망원정지(望遠亭)이다. 지금도 망원정의 권역이었을 자리에는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다. 역사와 문화재에 무지했던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망원동 주택가 쪽으로 난 망원정지의 출입구

옛 영광은 간 데 없고 퇴락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정자에서 내려와 망원동 주택가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한때 왕이 찾던 유서 깊은 정자는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여전히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