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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역사왜곡&일제청산

[스크랩] 독도와 대마도가 한국영토라는 증거 공부하기

by hwawoon 2013. 4. 11.

여기 독도와 대마도에 대하여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진리와 정의는 변함도 없고 패배도 없다고 봅니다.

일본은 100년내에 반이상이 지각변동에의한 지진등으로

해저에 갈아 앉아버릴 운명의 나라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민족은 일본에 이는 자연피해를 불상히 여기고,

도와주고 하겠지만...

 

일본이 독도에대해 억지욕심을 부리고 행사를 할때마다

대해일,대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일본은 왜 못느낄까요?    

 

아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시는 애국심을 발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8월10일을 독도의 날로 정하고 온 국민이 독도사랑의 날로, 

독도에 대한 공부와 경각심 발휘의 날이 되도록 협조 바랍니다.  8833 김수창 배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8833수창" <soochang2021@hanmail.net>
받는사람: <soochang2021@daum.net>
날짜: 2013년 4월 09일 화요일, 21시 28분 27초 +0900
제목: 독도&amp;대마도는 한국땅!!! 꼭 읽어보시고 저장,배포를 최대한!!! 꼭 바랍니다.


대마도가 한국땅/이승만전대통령,日에 수십차례 요구

-

본 메일 내용을 국가기관,공공기관,동호인을 비롯한 아시는 모든이에게

전달 하시고 다시오면 또전달 하여 애국행동 으로 일본의 만행을 분쇄

합시다. 선구자의 절규 010-4216-7470

일본, 대마도가 조선 땅이란 공식 지도문서를 의도적으로 은폐

 

미국과 협상에서 국제공인지도로 활용, 미국-영국 지도도

"대마도는 조선 땅"으로되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우리 지식인 중 일제 식민지 역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서양에서 서양역사를 통해, 구한말 우리 역사와 일본의 한국 영토침탈

과정을 공부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과 1949년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고 한 발언 중

 

 ‘오래된 해상경계“는 어디일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3회이승만 포럼에서 “이 오래된 해상경계는

대마도와 일본 본 섬 사이의 현해탄”이라고 밝혔다.


즉 대마도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주장이다.

0여개 군도)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해놓았다.

사진의 지도는 독일인 클라프로토(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지도는 대마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임을, 색으로 구분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 프랑스어 판 지도의 국제적 가치는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의

일본어 논문(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

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과 조선총독부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활용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막부 측은,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그 프랑스어판을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즉 일본은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대사,

영국의 알코크(Alcock) 대사 등 당시 열강 대사들에게 이 지도를

제시하면서, 국제적인 영토 분쟁의 공식 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김 대령은 “이 같은 미일간의 오가사와라 영토분쟁을 해결한 하야시

시헤이에 대해 해설서에는 '모든 일본인은 하야시 헤이시 선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함. 광격천황께 바쳐져서 원본을 친히 열람하셨음.'이라는 표현이 있어 이 지도를 일본이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증명됐다“

고 강조했다. 김 대령은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된 삼국접양도를

이토오 히로부미도 알고 있었다”면서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증거자료를 없애고 사실과 다른 자료를 19세기부터 지금까지

다량 배포함으로서 우리를 기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령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어판

<삼국접양지도>(구글에도 있음)는 물론, 심지어는

일본 극우단체가 제시한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조차도 모조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김 대령은 또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미국 페리제독의 1865년 일본 지도를 함께 제시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미 의회 지시로 미-일 조약체결(1858년)에 따라

페리제독의 정찰결과를 토대로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미 국가기록문서소(NARA ;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당시 기록과, 1862년 미-일 영토협상 후 미국에서 작성된 1864~68년

일본 지도 역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영국지도에도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기하고 ‘대마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지도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김 대령은 “한-일간의 해상 국경선은 일본지명사전에도 ‘고래로부터

일본과 한국,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현해탄

(玄海灘), 일본은 겐카이나다(玄界灘 )으로 부르고 있는 곳, 즉,

대마도 남단 한참 아래인 이끼섬과 일본 본토 사이”라며

“일본이 현재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대마도의 진실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아직도

유효하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주; (윤정우 씀)

 

포럼후에 대마도반환추진국민운동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박수가 나왔습니다.

 

또한, 일본교과서에 1930년경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땅임을색칠한 지도가 있다는것을 보여 주는

노신사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김대령은 6.25전쟁이 터지자, 이승만대통령은 우선 소련 공산당을

무찌를 때까지일본에 대한 반환요구를 잠시 참자는 발언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상세한 포럼내용이 추가 보도 될것으로 봅니다.

최종편집 2011.05.11 18:48:52......

온종림 기자

 

 

대마도 반환하라” 이승만, 에 수십차례 요구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 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고 뉴데일 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이 대통령은 회견에서 "대일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하여야 한다"며 "특히 대마도는 별개로 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왔고 도민들을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

거듭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는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와 함께 한일회담

협상과 맞물리면서 60여 차례나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보도된 국내외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를 반환받는 것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함께 중국 여론도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를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했던 사실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어떤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해방-건국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실지(失地)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

정책 연수를 위해 1년간 머물렀다. 조지 워싱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부를 마친 곳. 건국대통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1907년 청년 이승만의 흔적을 찾던 김 대령은 우연히 조지워싱턴대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을 발견하고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 중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래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있다'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발견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 김 대령은 이

'한-일 간의 오래 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에 오른 뒤 기회만 주어지면

"대마도를 불법 점거한 일본은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수십 차례나 주장한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 년 간의 집요한 연구와 추적 끝에 김 대령은 이승만의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도 밝혀냈다.

 

거리상으로도 우리나라가 훨씬 더 가까운 대마도는

옛날부터 조선인들이 더 많이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때 그시절

'8.10 독도의 기적'!

 

58년전 8월10일,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 등대 점등식을 세계에 공개했다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 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독도 등대. 사진은 증축된 현재의 모습, 갈매기들이 아름답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독도 등대.

사진은 증축된 현재의 모습, 갈매기들이 아름답다

 

 

이번에도 8월 10일!

같은 날에 같은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나.

58년전 바로 이날은 ‘독도는 우리땅’임을 세계에 알린 날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깜짝 방문’한 이날,

이승만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올해는 ‘평화선’을 선포한지 꼭 60주년!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포함한 영해를

‘평화선’으로 선포(1952년 1월18일)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대마도를 도둑질했던 수법으로 진작 독도를 먹어버렸을지도 모른다.


1954년 7월30일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대통령 부부가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 부부 및 그 손자들과 공식사진을 찍었다.

 

1954년 7월30일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대통령 부부가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 부부 및 그 손자들과 공식사진을 찍었다.

 

 

이승만은 독도의 등대점등식을

왜 하필 방미 기간에 하라고 지시했던가.

1954년은 6.25남침전쟁이 휴전(1953년7월27일)한 일년 후.

미국은 한일우호관계 회복을 극동정책의 핵심으로 삼고

이승만 대통령을 공식 초청한다.

국제공산주의를 내세워 동유럽과 중국 대륙, 한반도 절반을 차지한

소련의 신식민주의 패권을 뒤늦게 깨달은 미국.

냉전시대가 본격화되자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켜야만 했다.

이승만은 그러나 독립운동과 건국준비 때부터

줄곧 미국의 ‘좌우합작’ 압력 등을 거부해온 불굴의 지도자가 아닌가.

게다가 전쟁중에도 일본을 집중 지원하는 미국이 싫었다.

전쟁물자 공급을 도맡은 일본은 패전 10년도 안되어 일약 떼부자가 되다니.

그것도 한국을 강점했던 범죄자가 한국전쟁을 이용해 경제부흥을!

“이게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리야?

정상회담 필요없다.

백악관에 안간다.”

1954년 7월30일 오전 10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2차 회담이 끝나게 되면 발표할 공동성명 문안을 보자

이승만은 분노했다.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우호적이고...운운’하는

대목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들이 날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이러면 아이크 만나지 않겠다.”

백악관의 독촉과 측근들의 건의에 마지못한 듯

이승만은 뒤늦게 아이크(아이젠하워)와 마주 앉았다.

아이크는 한일국교수립이 시급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사전에 일본과 합의한 뒤였다.

“이대로는 안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 안하겠다.”

이승만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놀란 아이크는 화를 내며 옆방으로 가버렸다.

진작부터 화났던 이승만이 소리쳤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회담은 결렬 직전.

화를 삭인 아이크가 다시 회담장으로 나왔다.

이번엔 이승만이 벌떡 일어섰다.

“먼저 간다. 외신기자클럽 연설 준비 때문에...”

백악관을 나와 버렸다.


1954년 7월28일 미국 양원합동 의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7월28일 미국 양원합동 의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겁쟁이들이 하나님이 다 차려준 밥상을 걷어찼다.

한반도 통일전쟁은 이제부터다.”

마중 나왔던 닉슨 부통령의 얼굴이 벌개졌다.

7월28일

미국 양원합동 의회 연설은 미국정부와 미국민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한반도에서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는 현명치 못한 사람들의 휴전으로 헛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자유인들이 살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악의 힘’에 유화적이거나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면, 자유세계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바보같은 휴전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친구들이어,

공산주의를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 마시오.

치명적인 바이러스입니다.

퇴치 투쟁에 나서야만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 주장이 강경합니까?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든지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끔직한 세력입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궐기합시다!”

휴전을 결사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염원했던 이승만은

‘성스러운 통일전쟁’을 즉시 다시 하자고 거듭 주장했다.
매카시 의원의 공산당 고발로 반공분위기가 고조되어있던

당시 미국회의원들은 33차례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소련 간첩으로 체포된 미국무성 실세 알저 히스(루즈벨트 대통령 측근)가

유죄판결을 받은 직후이기도 했다.


미국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연설에 기립박수를 보내는 미국회의원들.

 

미국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연설에 기립박수를 보내는 미국회의원들.


이튿날 이승만은 미리 준비한대로

판문점의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철수’와 ‘휴전협정 백지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직접 발표했다.

언론들은 바빴다.

'외교의 달인' 이승만 특유의 현장 외교 전술은 눈부실 정도였다.

양국에서 동시 발표된 한미정상간의 공동성명서에는

‘한일관계’에 대한 단어가 한 개도 없었다.
한국이 미국에 요청한 군사-경제원조 7억달라도 물론 합의되었다.


1954년 8월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영웅 퍼레이드'를 벌이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8월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영웅 퍼레이드'를 벌이는 이승만 대통령.

그때, 일본의 '독도 장난'이 있었다.

뉴욕타임즈(7월31일자)에 ‘다케시마를 한국이 점령,

일본 주장’이란 제목이 붙은 기사가 2개면에 걸쳐 실렸다.

이승만도 이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100만인파의 환호속에

‘영웅 퍼레이드’를 벌인 이승만은

마지막 기착지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측근에게 지시했다.

“준비는 끝났는가. 등대에 불을 켜라.”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1948년 건국과 동시에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수십차례 요구했던 이승만.

김일성의 6.25남침으로 물거품 되자

일본이 탐내는 독도에

등대를 건설하고 점등식을 준비해 왔던 이승만의 빅카드.

한일관계 회복을 밀어붙이는 미국에게 보란듯이

미국 방문 중에 ‘독도는 한국땅’임을 선포하는

‘깜짝 외교 쇼’를 벌였던 것이다.

국토방위는 전쟁만으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통치자의 의지와 국민의 애국심이 등대불로 불타야 하는 것!

 

우연의 일치일까.

58년 시차를 둔 같은 날 두 대통령의 독도 지키기!
이승만과 이명박의 ‘8.10 역사 이벤트’!!

독도 이력서에 5천만 소유주의 지워지지 않을 인증이 또 찍혔다.

선대가 물려준 영토를 지키는 것은

‘국가보위’ 첫 째 의무다.
그 소중한 우리 땅 독도 앞바다를 일본에게

‘공동수역’으로 열어 준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도대체 무슨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에 무슨 책 잡힌 것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뜬 금 없이 일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다니...

나라 땅을 적에게 내주는 ‘친일파’는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2012년 8월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령' 글자를 만지고 있다.

 

2012년 8월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령' 글자를 만지고 있다.

 

인보길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MB식 克日스타일! 8월의 승전보!

이승만이 지킨 독도, DJ가 日에 양보!

이승만 '평화선'-박정희 '전관수역'->김대중 '어업협정'서 바다 내줘

2012년 8월 10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아주 중요한 날이 되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이 현직대통령으로서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자기나라 땅에 간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는 반문도 있을 수 있겠으나,

십 수 년 전부터 집요하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강대국 일본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직대통령들이 껄끄럽게 여겼거나 작전상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독도를 방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제 36년간 한반도를 지배하다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쫒겨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떳떳하게 주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김대중정부 때 체결한 소위 신한일어업협정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1952년 1월 18일,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

즉 이승만 라인에서도 독도는 우리 영토임을 만천하에 공포했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된 한일 어업협정에서도

독도는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어업수역)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9월 25일 소위 신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를 중간수역(공동관리수역)으로 빼버리고 나면서,

일본은 이를 계기로 끈질기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독도영유권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떼나 써보는 정도였었습니다.

하지만 독도가 중간수역 즉 한일 공동관리수역으로 빠져나가자

법적인 논리적인 근거가 생겼다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더니만 8년 전 부터는

일본 국방백서에 아예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명기를 해놨다고 하니,

오늘날 독도 영유권 문제는 김대중전대통령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과거의 전직 대통령이

잘못 저지른 일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였기에

이대통령이 직접 팔 걷어부치고 독도를 전격 방문하여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을 만천하에 각인 시켰습니다.

현정부에서 하는 일이면 무조건 반대부터하고 비난하는 이들은

긁어부스럼 만들었다며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국제사법재판을 받게 하려는데 일조했다거나

대일본 카드를 다 써버렸다며 비난을 일삼습니다.

도대체 저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대북 이슈에서는 북한 편들고,

대일 이슈에서는 일본 편을 들어주니

어느 나라 국민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토문제에서는 단호한 입장이 필요합니다.

다른 나라가 영토를 침탈하겠다는데도 그냥 기회나 엿보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불리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나 하고 앉아 있어서는,

영토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도 대한민국 영토라는 역사적 기록물들이

전 세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전쟁이나 물리력으로 영토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법입니다.

패망한 일본이 독도도 되돌려주는 것이 합당하고,

1998년까지는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해방후부터만 치더라도 70여 년 간 실효적 지배를 해왔는데

왜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불리하다고 지레 짐작, 겁부터 먹어왔었는지

지금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국민정서와는 다르게 독도 문제에 대처해 온 것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세계 2위였던 경제대국 일본하고 독도 영유권 가지고

분쟁하다가 지게 되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까봐서 겁을 먹고

이러저러 핑계를 대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에 반해 이대통령은 단호하게 영토수호 의지를 세계 만방에 보여주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이런 정도의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수 십 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에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힘겨워 하던 차에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인해 한 줄기 소나기 같은 시원함을 온 국민들이 느꼈습니다.

그동안 역대 정권들은 반일감정만 앞세워왔었지

시원한 대응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반일(反日)이 아닌 극일(克日)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보여준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광철 시민 논설위원



그런데 한심한 일이 벌어 졌다.

대통령 하겠다는 분들에게 기자가 대통령 당선되면

독도에 갈것이냐고 물었더니..

박근혜후보와 김두관후보는 간다고 했고

한분은 대통령 출마도 아리송한데 역시나 이것도 아리송이고

나머지 대통령 하겠다고 서로 내가 적임자라고 잘난체 하시는 분들은

즉답을 피했다고 하는데...그분들 어디나라 사시는 분들인가요?

위의 글좀 읽어 보시지요.

 

 

 


출처 : 전통문화지도사
글쓴이 : 마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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