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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역사왜곡&일제청산

[스크랩] 독도를 지킨 사람들/안용복 장군은 동해바다 파수꾼

by hwawoon 2011. 11. 15.

[내일신문]독도를 지킨 사람들/안용복 장군은 동해바다 파수꾼

 

40대에 일본에 건너가 영유권·어업권 문제 담판

2007-12-17 오후 2:05:03 게재

 

독도와 관련 빼 놓을 수 없는 역사인물중 한 사람이 안용복이다. 어부이자 수병이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과 울릉도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최초로 담판을 짓고 돌아온 민간외교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출생지와 출생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난 천민출신 어부로 알려지고 있다. 출생 연도는 2차로 일본에 건너갈 당시 일본기록에 갑오년생 43세로 되어 있어 역산하면 1654년으로 추정된다. 1693년(숙종 19년)과 1696년 두차례 일본 도쿠가와 막부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과 어업권에 대한 서계(書啓)를 받아낸 바 있다.


안용복은 1차로 1693년 동래어민과 함께 울릉도에 출어했다가 일본인 어부들과 싸우다 일본 호키슈(百耆州) 번주와 에도바쿠후(江戶幕府)에게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해 서계를 받아 귀국도중 쓰시마도주에게 빼앗기고 대신 울릉도 출어금지 요청서를 받아 귀국했다.


안용복은 1696년 2차로 울릉도 출어중 일본어선을 발견해 강제 정박시키고 불법어로 사실을 문책한 다음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을 자칭하고 일본 호키슈 번주에게 국경침범 사실을 항의하고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1697년 일본 바쿠후는 공식으로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확인하는 통지를 보내 이후 철종때까지는 울릉도에 대한 양국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안용복은 천민 신분으로 벼슬을 사칭하고 양국간 외교문제를 일으켰다는 죄로 유배형을 받아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그는 유배를 떠나며 “내 몸이 죽어서라도 우리땅을 찾으려는 것이었는데 귀양쯤이야 달게 당하겠노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반면 조선시대 정조는 동래수군 안용복을 한나라 고제의 용맹한 군사가 되고 남을 인물이라며 극찬했다. 영조때 대학자 성호 이 익도 안용복은 참영웅이라고 평가했다. 이 익은 “한 천한 군졸이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해 강한 적과 싸워 나라를 지켰건만 조정에서는 큰 상을 주지 않고 도리어 죄를 주어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달픈 일이 아니겠는 가”라고 했다.


조선후기 문헌들에서는 안용복의 활약상을 영웅적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이 익의 ‘성호사설’를 비롯 원중거의 ‘안용복전’ 서영보의 ‘만기요람’ 등은 안용복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노산 이은상 시인은 1960년 개천절에 “동해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땅이라 돌보지 않을 적에 적굴속 넘나들면서 저 님 혼자 애썼던가 상이야 못드릴 망정 형벌 귀향 어인말고 이름이 숨겨지다 공로조차 묻히리까 이제와 울릉군 봉하노니 웃고 받으옵소서”라는 시로 안용복의 업적을 기렸다.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학과 교수는 “안용복의 인식과 활동을 영토문제에 한정해 보지말고 거시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며 “안용복의 사건과 행동을을 통해 섬과 해양자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현실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출처 : 다음독도수호대
글쓴이 : 독도수호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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