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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탄압과만행7

[일제강점기/인적수탈] 일제의 강제 징용 피해자 자료 일제의 강제 징용 피해자 자료 강제징용 피해자 전우석씨의 사진과 사망진단서(1943년 사망)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자료들 (사진출처 : 뉴시스) ★ 일제강점기의 강제 징용 :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 을 공포하고 실시하였다. 한국 노동자들의 직업 선택권을 빼앗고 일본의 필요에 따라 강제 노동을 시켰다. 한국 노동자들은 사할린 섬이나 동남아시아, 남양군도 등에서 탄광, 군사기지 및 철도 건설에 동원되어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전후 전범으로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은 현재까지 일제의 강제징용을 부인하고 있다. 2021. 4. 3.
[일제강점기/민족말상정책]일본어 독본을 읽은 어린이들 일본어 독본을 읽은 어린이들 ★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이 실시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와 한글을 금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 : 일본이 일제강점기 193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사라지게 하여 최후까지 전쟁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 와 등을 내세우며 ,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치 참여와 교육 확대 등은 외면하고 차별은 개선하지 않았다. 2021. 4. 3.
[일제강점기/일제의탄압과만행] 일제강점기 한일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 시간 차이 일제강점기 한일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 시간 차이 2021. 4. 3.
[일제강점기/일제의탄압과만행]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상범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상범들 ★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 일제의 대표적인 언론 탄압법으로 1925년부터 시행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 탄압을 비롯하여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공화제 운동을 탄압하는 목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징역이나 금고형이었으나 1928년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개정되었으며,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 전체에 적용되었다. 광복 후, 1945년 10월 15일에 폐지되었다. 2021. 3. 29.
[일제강점기/일제의탄압과만행] 위안부 위안부 ★ 위안부(慰安婦, いあんふ) :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 일본군의 기만에 의해 징용 또는 인신매매범, 매춘업자 등에게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을 대상으로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 위안부는 한국인이 가장 많았으며, 중국인, 필리핀,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일본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있었다.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2021. 3. 15.
[일제강점기/일제의탄압과만행] 신사참배를 거부한 종교인을 처형하는 일본군 신사참배를 거부한 종교인을 처형하는 일본군 ★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 강요 : 일본 제국이 식민지, 특히 한국에 신사를 세운 뒤 한국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일제 강점기의 정책. 일제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부터 신사참배를 장려하였으나 심하게 강용하지는 않았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거부는 묵인하였다. 그러나, 1930년 후반에 중일 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학교는 물론 교회의 성직자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은 신사참배에 거부하는 종교인과 학생들을 참수하기도 했다. 2021. 3. 12.
[일제강점기/일제의탄압과만행]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 : 1907년(융희 원년) 대한제국을 점령한 한국통감부가 서울에 건설한 형무소. 수많은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수감자가 3,000여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도 구치소와 교도소로 이용되었는데,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1987년 교도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고 옥사(獄舍)와 건물을 보존하고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1992년 으로 개원하였으며, 이후 복원을 거쳐 사적으로 지정하고 1998년 으로 개관하였다. 사적 제 324호. 2021.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