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생들이 역사를 못하는 이유
사교육을 업으로 삼은 뒤부터 수많은 학부모를 만났다. 나와 상담을 한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도대체 왜 역사(한국사)를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국영수도 아닌 역사를 과외까지 받아야 하느냐.”며 하소연을 한다. 나와 상담하는 학부모들은 국영수가 아닌 역사 때문에 사교육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왜? 어째서? Why?
학부모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지금의 학부모 세대가 학생일 때는 역사 때문에 학원에 가거나 과외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역사는 재수 학원 종합반이나 단과반에나 가야 들을 수 있는 과목이었는데, 재수생이 아닌 다음에야 수강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영수처럼 학원에도 가고 과외도 받는다.
그때는 그랬다. 역사는 하룻밤이나 며칠 열심히 하면 성적이 확 오르는 과목이었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에 국영수가 아닌 과목 때문에 학원에 가거나 과외를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의 역사 실력에 뒷목을 잡은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요즘에는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포기한 ‘역포자’도 적지 않다.
한 세대 전에 역사는 사교육이 없이 혼자 공부해도 충분한 과목이었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과목이 되었을까.
요즘 학생들이 역사를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나름대로 분석한 이유 몇가지만 추려 보았다.
첫 번째는 교육의 변화다. 역사는 독립된 과목이지만 사회계열 중 하나이며, 사회 계열의 여러 과목과 연관성이 많다. 말하자면 역사를 잘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사회 지식이 갖추어져야 하고, 이런 것은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중학교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기초 지식은 초등학교에서 다 배워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수업이 진행되지만 많은 학생들이 이러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채 중학교에 진학한다.
현재 초등 교육 뿐 아니라 교육 전체가 창의성의 초점을 맞추고 발표와 토론 위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암기’ 또한 중요한 학습 방식의 하나인데 너무 폄하되고 있다. 토론과 발표도 아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예를 들자면 세종대왕에 대해 발표를 하려면 세종대왕이 누구인지, 업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이런 지식은 암기가 습득할 수 없다.
지금은 떠먹여 주듯이 지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암기 사항은 스스로 공부해야 발표도 하고 토론에도 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와 사회는 국영수처럼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받는 경우도 적고,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독서를 통해 스스로 지식을 습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어렵다. 학교에서는 예전처럼 구체적인 지식을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학생들은 그러한 지식을 익히지 못한 채 중학교에 진학한다.
두 번째는 중 ․ 고등학교에서의 역사(한국사) 수업 시간이 축소된 점이다. 지금 학생들은 중학교에서 2년 동안 역사를 배우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1년 동안 한국사를 배운다. 중학 역사는 한국사와 세계사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2년 동안 배운다고 할 수 없으며, 학교에 따라 수업 시간이 단축되기도 한다.
반면에 학부모들은 중, 고등학교 모두 3년 동안 한국사를 배웠다. 비록 고등학교 때에는 2학년때까지 또는 3학년 1학기 때까지 진도를 다 나가고 남은 기간 동안 문제 풀이를 하기는 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 한국사를 배웠다. 당연히 수업도 더 많이 했고 배우는 것도 많았다. 지금처럼 수행평가도 없었고 오로지 수업과 시험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학생들보다는 역사 지식면에서 훨씬 뛰어났고 수업도 더 자세했다.
그러나, 지금의 학생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훨씬 짧은 시간동안 한국사를 배우고 있다. 아무리 교육 시스템이 바뀌고 학습법이 달라졌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수업 시간이 대폭 줄었는데 이 간극을 메꾸기는 어렵다. 예전처럼 자세한 수업은 요원하며 진도 나가기만도 벅찬 경우가 많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초등학교 과정에서 기초 지식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학생들이 많아 학생들의 역사 실력은 더욱 떨어졌다.
세 번째는 근현대사가 대폭 강화된 점이다. 학부모 세대는 근현대사를 거의 배우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는 친일파와 군사 독재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었고,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근현대사 비중을 줄였고 수업도 대충하고 지나갔다. 심지어 아예 수업을 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사 수업에서 근현대사의 비중은 50% 이상이다. 예전에는 고등학교 교과서는 25% 정도였는데, 이것도 90년대 들어서 대폭 늘어난 것이었다. 근현대사는 전근대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암기할 것도 많으며 학습량도 압도적이다. 역사를 전공한 나도 때때로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많냐고 투덜거리곤 한다. 강화도 조약(1876)부터 경술국치(한일 합병, 1910)까지 무슨 조약이 그렇게 많으며 애국 계몽단체는 왜 그렇게 많은지.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신 조상님들은 존경하지만, 무슨 단체가 그렇게 많은지(게다가 단체 이름들마저 비슷하다!), 수업 준비를 하다보면 정말 골치가 아프다.
근현대사 비중이 늘면서 한국사의 난이도는 수직 상승하였다. 더욱이 수업 시간은 축소되었고 학생들의 평균적인 실력은 뚝 떨어진 상태이다. 이 시점에서 ‘역포자’는 대폭 늘어나 수많은 학생들이 역사를 포기하곤 한다. 수업을 잘 버틴 학생들도 근현대사에 들어가면 손을 놓고 도망쳐 버린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다.
네 번째는 부실한 세계사 교육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근현대사 비중의 확대와 깊은 관계가 있다. 전근대사까지만해도 중국사와 일본사 정도만 알아도 학습에 지장이 없다. 깊이 알 필요도 없고 우리나라와 같은 시대에 있었던 나라와 왕조, 아주 큰 사건 정도만 알면 수업과 성적에도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근현대사는 세계사 전체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과 그들의 동맹 및 대립 관계도 알아야 한다. 대한제국이 서구 여러 나라와 맺은 조약, 일본이 서구 열강과 협력하거나 대립하면서 조선을 침략한 과정,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국제사회의 흐름이 어떻게 변했는지 등, 세계사 지식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성적이 떨어지는 현상은 고등학교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고등학교 수업이 중학교에 비해 월등하게 어렵기 때문이지만 중학교 때 세계사 교육이 매우 부실함도 한 몫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중등 역사는 한국사와 세계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일선 학교에서는 한국사 수업만으로도 벅차서 세계사는 ‘대충’하거나 거의 수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계사를 모두 할 시간이 없어서 중국사와 유럽사만 하는 경우도 보았는데 이런 경우는 양반이다. 적지 않은 학교에서 세계사는 수행평가만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중학교 때 세계사를 배우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등학교에도 세계사 수업을 하지만, 고등 세계사는 선택과목이며 수업하지 않는 학교가 많다. 세계사 수업을 한다 할지라도 한국사는 1학년 때 배우고, 선택과목은 2학년부터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한국사 성적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급한 네 가지 이유 외에도 요즘 학생들이 역사를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며, 교육 시스템과 많은 문제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현 시스템에서 예전처럼 학교 수업만 듣는다고 해서 역사를 잘 할 수 없다.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갈 수 없고, 안일하게 학교 수업만 들으면 되겠지 했다가는 어느새 한참 뒤처진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필자는 역사와 사회를 가르치고 있으며, 글의 모든 내용은 역사 ․ 사회 수업에 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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