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이가 인당수에 빠졌다고?
- 전통적 권장도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
예전에 <도전 골든벨>과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고등학생들이 출연하여 퀴즈도 풀고 장기도 선보이는 프로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 나이 때 아이들은 끼가 넘치고 흥도 넘쳤다. 배꼽이 빠질 만큼 웃기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학생이 있다. 기발한 개그를 선보이며 청중을 웃겼는데, 공연 중에 “춘향이가 변사또와 결혼하여 심청이를 낳았다”는 농담을 던지자 진행하던 학생들은 물론이고 방송을 진행하던 아나운서마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도 TV를 보다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학생과 시청자 모두 그것이 당연히 “농담”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것 때문에 뒷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도전골든벨의 한 장면
중등 한국사 수업 중 조선 후기 문화에 대한 것을 가르칠 때였다. 흥부전, 춘향전, 심청전 등의 한글 소설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예전에 보았던 그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외울 것이 많아 지루할 수 있는 수업이어서 분위기를 좀 즐겁게 하려고 농담을 던졌다.
“춘향이가 인당수에 빠진 거 아니야.”
학생들은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그래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웃거나, 자기들을 너무 무시한다는 등의 반응을 기대했는데 너무 의외의 대답이 나와서였다. 학생들도 농담으로 받아쳤나 싶어 다시 물어봤더니 정말 모르는 것이었다! 그 뒤로 수업 시간마다 확인해 보았더니 중학생 중 상당수가 춘향전과 심청전의 내용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청전과 춘향전
그 뿐만이 아니었다. 초등학생이든 중고생이든, 학령과 상관없이 학부모 세대가 학교나 학원에서 따로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던 배경 지식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애교였다. 심한 경우는 선덕여왕이나 김유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학생도 있었다. 또한, <올리버 트위스트>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같은 명작동화를 예를 들어 역사적 배경이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해도 “그런 책 읽어 본 적 없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 이후에 수업할 때마다 학생들의 배경지식 수준을 알아보고 어린 시절 읽은 책을 물어 확인하여 내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하였다. 원인은 ‘독서’였다.
요즘 학생들이 예전에 비해 결코 독서량이 적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읽었는가’였다. 학생들의 배경지식이 부족한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읽을 거리였다. 내가 어릴 때, 즉 학부모 세대가 어린 시절에는 읽을거리가 다양하지 않아서 읽은 책이 누구다 다 비슷비슷했다. 전래동화, 세계 명작동화, 위인전 등. 그래서 학생들의 배경 지식도 큰 차이가 없었고 교사가 굳이 춘향전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들었고 선덕여왕이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어릴 때(미취학~초등 저학년 시기)에는 보편적인 독서를 하고, 고학년이 되고 중고등학생이 되어 가면서 자신의 관심 분야 도서를 깊이있게 읽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읽을 거리를 접하는 요즘 학생들은 어린 시절에 이러한 보편적인 독서를 하지 않은 경우가 꽤 많았다.
요즘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영어 동화를 읽고 현대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접하며 자란다. 그런 작품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인지력이나 어휘력 신장에 당연히 도움이 되지만 학교 수업에 도움이 되는 보편타당한 배경지식을 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나도 한 때는 권장도서를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러한 일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권장도서, 특히 세대를 이어 변하지 않고 선정되는 전통적 권장도서를 읽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앞서 언급했던 위인전, 전래동화, 세계명작동화 등, 보통 세트로 출판되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책들은 인문과 사회계열 과목의 학습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위인들의 삶이 역사의 큰 사건과 맞물려 있기에 위인전은 당연히 역사 학습에 좋다. 이순신 장군의 전기를 읽으면 임진왜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링컨의 전기를 읽는다면 미국의 남북전쟁 시대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근대 이전의 한국 위인의 전기는 국어/문학 수업에도 도움이 된다. 옛 위인들의 전기에는 그분들이 지은 시조 등이 실린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시문(時文)은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것이 많다.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閑山島歌)
세계명작동화는 세계지리와 세계사에 학습에 유용하다. 명작동화는 18~19세기 구미 작가들의 작품이 많아 서양 및 세계 근대사를 이해하기에 좋고, 지리와 경제 등의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책을 읽었다고 해서 이러한 지식을 모두 습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책을 한번이라도 읽은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실력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독서를 하지 않고 고학년이 되어버린 학생들은 독서로 배경지식을 습득하기에는 시기적으로도 늦은 경우가 많고 시간도 별로 없다. 그저 수업 시간에 제대로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학부모들과 상담을 할 때 저학년 이하의 자녀들이 있는 경우, 전통적 권장도서를 읽도록 지도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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